첫 사랑이 아닌 청춘을 떠나 보냈다.
아카데미하우스 뒤편 계곡 바위 위에서 나는 편지를 태우고 있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군 복무 시절까지 받았던 편지들이다. 불길은 종이 끝부터 천천히 삼키고, 연기는 바람에 흩어졌다.
내 곁에는 한 여인이 말없이 앉아 있다. 한때는 첫사랑이었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된 사람이다. 편편한 바위에서 잠든 아기가 작은 숨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편지가 타들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전 여름밤으로 돌아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골 마을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한 여고생이 있었다. 우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사랑방에서 윷놀이를 했고, 둘이서 논두렁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칠흑 같은 밤길에서 그가 내 손을 잡았던 순간의 떨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만남은 이어졌다. 종로의 다방과 고궁, 도서관과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같은 대학에 가자고 약속했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사랑은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영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영원을 믿었던 젊음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세상은 넓어졌다. 그는 자유롭고 당당했다.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셨다. 나는 그런 그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웠다. 서로를 바라보는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군에 입대한 뒤에도 그는 꾸준히 편지를 보내왔다. 바다 위 구축함에서 생활하던 내게 그 편지들은 육지와도 같았다. 나는 변함없는 사랑을 믿었다. 하지만 믿음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휴가 중 들은 친구의 고백은 긴 사랑의 시간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군에 있는 동안 그녀를 몇 번 만나 술을 마셨고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었다고. 분노했고 절망했다. 그리고 이별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나 자신을 놓아주지 못했다. 첫사랑의 배신은 사랑의 상실보다 자존심의 상처로 더 오래 남았다.
세월은 흘렀다.
온라인 게임을 다니고 슬롯생활을 하면서도 그녀의 편지는 버리지 못했다. 잊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편지 뭉치는 서랍 속에서 오래된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났다.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미움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안도감이었다. 나만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그 역시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다가왔다.
“잘 지냈어? 한 번 볼 수 있을까?”
며칠 후 아카데미하우스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리고 계곡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편지를 태우기 시작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논두렁길의 별빛도 함께 올라가는 듯했다. 완행열차에서 나누었던 수줍은 대화도, 군함 위에서 읽었던 편지들도 연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태우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받았던 편지가 아니었다.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이었다. 첫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사랑이 처음이어서가 아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믿었고, 사람의 마음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첫사랑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기억이 아니라 세상을 믿던 자신의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편지가 재가 되어 시냇물에 떠내려갔다.
나는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헤어짐이 배신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한 사람의 생을 지나온 소중한 계절로 남기도 한다. 연기는 하늘로 흩어지고 재는 물길 따라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첫사랑이 아닌 청춘을 떠나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