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과 걷던 시간
목요일 독서모임에서 한 친구가 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은 무엇인가요?"
질문을 듣는 순간, 여행지가 아니라 시간이 먼저 떠올랐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7년 전 첫째 딸과 함께 떠났던 싱가포르 여행이었다. 결혼을 석 달 앞둔 딸은 어느새 나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영어가 유창한 딸의 뒤를 편안히 따라다니며, 부모와 자녀의 역할도 조금씩 바뀌어 간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 전 막내아들과 남편, 나 셋이 함께 다녀온 대전 여행이다.
대학 졸업 후 1년여 만에 자신이 꿈꾸던 온라인 게임에 취업한 아들에게, 슬롯인이 되기 전 작은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 여행지를 대전으로 정한 것도 아들의 의견이었다.
첫날 저녁,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유성 족욕장을 만났다. 체질에 따라 온도가 다른 탕에 발을 담그니 하루의 피로가 스르르 풀렸다. 여행은 계획보다 이런 우연한 선물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늦은 밤에는 아들과 함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보았다.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서로의 감상을 나누었다. 같은 영화를 보고 서로의 여운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다음 날에는 세종국립수목원을 천천히 걸었고, 저녁에는 야구장을 찾았다. 아들과 나는 두산을, 남편은 한화를 응원했다. 응원하는 팀은 달랐지만 같은 시간을 즐기는 마음은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내가 배우고 있는 모던수채화 캘리그래피를 함께 해보자고 권했다.
한 시간 남짓 집중해 작품을 완성한 아들은 "은근히 힐링되네요."라며 웃었다.
완성한 그림은 여자친구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선물 가게를 몇 바퀴 돌아도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지 못했던 아들에게, 직접 그린 그림은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이 되었다.
마지막 날 성심당에서는 저마다 전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며 빵을 골랐다.
나는 엄마와 친구들을, 남편은 친척과 이웃을, 아들은 여자친구와 감사한 분들을 생각했다.
누구를 떠올리며 선물을 고르는지에도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전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아쿠아리움에서는 뜻밖의 즐거움을 만났다.
호랑이와 사자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는 아들의 모습은 슬롯인이 될 청년이라기보다 여전히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나는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돌아오는 길, 시장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정갈한 밑반찬에 찌개도 일품이었다.
준비한 밥이 떨어지면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주인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았다.
더 벌 수 있는데도 욕심내지 않는 삶.
여행은 풍경뿐 아니라 사람을 만나며 배우는 일이라는 것도 다시 알게 되었다.
서대전역에서 아들은 서울행 기차를 탔고, 우리는 강릉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우리 셋은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싱가포르와 대전은 서로 다른 여행이 아니었다.
하나는 딸이 내 손을 놓고 자신의 삶으로 걸어가던 여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들이 슬롯를 향해 첫걸음을 내딛기 전, 우리에게 잠시 허락된 여행이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의 손을 오래 붙잡고 있는 일이 아니라,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함께 걷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전을 떠올리면 수목원보다, 야구장보다, 성심당보다 먼저 아들과 나란히 걸었던 시간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