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리에서의 2박 3일
밖에서 보이는 풍경과 안에서 느끼는 풍경은 종종 다르다.
홍천 연봉리에 있는 작은 숙소, 연봉리 스테이도 그랬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아담하고 예쁜 공간 정도로 보였다.
1층에는 커피숍과 뒤뜰, 그리고 독립서점이 있었고, 2층에는 숙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알았다.
아, 이곳은 누군가의 섬세한 손길이 오래 머물렀던 공간이구나.
밖에서 본 풍경보다 안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열 배는 더 컸다. 구석구석 쌓여있는 바카라들을 보면서 일주일쯤 머무르면서 보고 싶은 바카라들을 마구마구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요즘 조금 지쳐 있었다.
87세, 천 권이 넘는 독서를 이어오신 엄마의 독서노트를 바탕으로 바카라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지만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원고는 쌓여 가는데 마음은 자꾸 흩어졌다.
"어디 가둬 놓고 글만 쓰게 해 주면 좋겠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연봉리 스테이의 주인장은 선뜻 공간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2박 3일 동안 글쓰기 합숙에 들어갔다.
아침에는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직접 만든 치아바타 샌드위치는 기대 이상이었다. 천천히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퍼졌고, 커피 향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숙소 안은 더욱 좋았다.
아기자기한 소품들, 적당한 빛, 적당한 여백.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김현식과 이문세의 LP판이었다. 오래전 시간을 품고 있는 음악들은 낯선 공간을 금세 익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첫날에는 가리산 휴양림을 걸었다.
혼자 걷기에 좋은 길이었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과 초여름의 초록빛은 말을 걸지 않았지만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연봉리 스테이의 매력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주인장의 다정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게스트이자 스태프로 지내던 프랑스 여인과 40대 사진작가 멋쟁이, 그리고 나.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우연히 같은 공간에 모였지만 금세 친구처럼 웃었다. 함께 나눈 대화와 깔깔거림은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특히 엄마가 챙겨준 백김치를 함께 나누어 먹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낯선 나라에서 온 프랑스 여인이 맛있다며 연신 손을 뻗는 모습을 보는데 괜히 뿌듯했다. 엄마의 손맛이 국경을 건너 작은 식탁 위에서 통하고 있었다.
둘째 날은 하루 종일 실내에서 작업을 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물론 글쓰기였다.
미뤄 두었던 독후감 다섯 편을 추려 타이핑했고, 오래전에 써 둔 원고들의 오타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흐릿했던 바카라의 목차도 90퍼센트 가까이 완성했다. 혼자서는 몇 달이 걸렸을 일을 단 며칠 만에 해낸 셈이다.
아마 공간의 힘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집중하게 만드는 힘.
떠나기 전, 나는 작은 선물을 남겼다.
주인장과 약속했던 모던 수채화 캘리엽서 다섯 장.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문장을 적어 식탁 위에 살포시 놓아두었다.
누군가 정성으로 만든 공간에 머물렀다면, 떠나는 사람도 작은 정성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 풍경을 만나러 가는 줄 알지만, 사실은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봉리 스테이에서의 2박 3일은 쉼이면서 작업이었고, 여행이면서 공부였다. 무엇보다 바쁘게 흘러가던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여행이었다.
다시 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