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질수록 따뜻해지는 여행

오늘의 노을이 어제와 다른 이유

by순간수집가

5월을 보내며 딸부부와 손주 둘

그리고 남편과 함께 떠난 여행이다.


제주에 도착한 첫날 저녁,
함덕해변의 노을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하늘은 붉고 바다는 푸른데,
그 둘이 만나는 경계는 설명할 수 없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고,
감탄이라는 말로도 다 담기지 않았다.

그저 숙연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작아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아짐 속에서 마음은 더 넓어진다.

다음 날 찾은 돌문화공원에서는 또 다른 제주를 만났다.
나는 제주를 돌하르방의 섬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돌하르방보다 먼저 존재했던 돌할망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의 여신 설문대할망.
섬을 만들고 산을 빚어냈다는 거대한 어머니의 신화는 제주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바람과 돌과 세월이 쌓아 올린 제주의 시간.
관광지를 둘러본 것이 아니라 제주가 품고 있는 오래된 기억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다시 찾은 함덕해변.
분명 같은 바다였고 같은 해변이었다.
하지만 전날의 노을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노을은 매일 지지만 같은 노을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처음에는 차가웠다.
그런데 한 걸음,
또 한 걸음 더 들어갈수록 물은 오히려 따뜻해졌다.
신기했다.
차가울 것이라 생각했던 바다가 깊어질수록 따뜻해진다는 것이.
문득 사람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조금 더 이해하려 할수록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발견하게 되는 존재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손주들과 물장구를 치며 놀던 순간이었다.
딸은 잠시 쉬고,
나는 손주들과 웃고 뛰고 물을 튀겼다.
파도보다 먼저 웃음소리가 번졌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풍경은 지나가지만 함께 웃은 기억은 오래 남는다.

셋째 날에는 전이수 미술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치매를 주제로 한 그림바카라을 읽어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작가의 목소리는 맑고 담담했다.
기억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양과 그 곁을 지키는 늑대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다가 울컥하고 말았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누구나 기억을 잃어갈 수 있다.
하지만 기억보다 먼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든이 넘어 바카라을 펼치고,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며 살아가는 엄마.
지금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새삼 마음에 와 닿았다.

마지막 일정은 잠수함 체험이었다.
바다 위에서 바라보던 제주와 바다 아래에서 바라보던 제주는 또 달랐다.
햇살이 닿는 수면 아래로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보이지 않던 세계가 조용히 펼쳐졌다.

세상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생각해 보니 이번 제주 여행이 그랬다.
첫날의 노을과 둘째 날의 노을이 달랐고,
바다 위와 바다 아래가 달랐고,
제주의 현재와 신화 속 시간이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주들과 물장구를 치며 웃고,
엄마를 떠올리며 울컥하고,
가족과 함께 노을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제주에서 만난 것은 노을과 바다만이 아니었다.
함께할 수 있는 오늘의 소중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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