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포기

가장 안타깝고 아쉬운 실패

bygrassrain


애당초 입시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화실에서의 일 년은 나를 치료하는 시간이었다. 몸통 한가운데에 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덩어리가 확연하게 줄었다. 공황 증상 또한 전무했다. 게다가 재수생활을 하며 감당해 오던 몸뚱이의 중력 크기 또한 실제로 가벼워졌다.

끼니를 잘 챙기지 못했다. 주말에만 밥을 제대로 먹었다. 어차피 집에서는 잠만 잤다. 엄마는 첫째 딸의 첫 입시 실패, 이 말은 즉 집에 재수생이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려야 했다. 엄마에겐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았다. 여대에 다니는 딸이 생길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엄마에겐 실패감과 좌절감을 남겼고, 회피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엄마는 나의 끼니에는 관심 가질 수 없었다. 힘겨워하는 엄마에게 용돈까지 말할 수 없었다. 재수하는데 드는 비용이 꽤 비싸다는 엄마의 넋두리에 염치없이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먹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재수 생활을 지원해 주시는 부모님을 그렇게라도 돕고 싶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단식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저장해 둔 지방이 충분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차가워진 가을바람으로 오랜만에 꺼내 입은 긴 옷들이 헐렁해진 걸 확인하고서 엄마는 내가 잘 먹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단식은 염증을 없애준다던가. 다이어트는 가장 확실한 성형이라던가. 스무 살은 내면적, 외면적으로 비워내고 다듬어가는 시간이 되었다.

덕분에 대학에 입학한 후, 나의 몸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가뿐해졌다.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고 밖으로 나갈 핑곗거리 또한 많이 생겼다. 법적 성인이 됨과 동시에 수여된 어른이라는 직위와 대학생이라는 역할은 나에게 개운함을 가져다주었다. 생각보다 그리 길진 않았지만 말이다.




너 여기 좀 앉아봐. 너 이게 뭐야? ---이번엔 또 뭐야. 요즘에는... 진짜 뭐 없는데. --- 엄마가 이거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 저건 바카라상 서랍 깊숙이 숨겨놓았던 편지다. 지금은 군대 간 전 남자친구의 편지. 받은 지 몇 주나 지났다. 저게 왜 거실 한가운데에, 게다가 엄마아빠 사이에 있을까. --- 야 이 oo야. 군대 가는 애한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뭔데 남의 귀한 집 아들한테 상처를 줘? 네가 군대를 알아? 군대 제대할 때까지 네가 기다려야지. 네 까짓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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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게 치유 당하고 있어요. 제 글이 읽히는 건 부끄럽지만, 어떤 누군가에겐 작은 토닥임으로 느껴지면 좋겠어요. (글쓰기로 생긴 수입은 길 위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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