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빨리빨리"는 물론, 세트 메뉴인 "미리미리"라는 말도 참 싫었다.
처음 일본에 와서 제일 좋았던 건,
혼자 생활하면서 "빨리빨리" 혹은 "미리미리"하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
그리고 이곳 템포가 한국보다 다소 느려서 내 느림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북이처럼 느려 터지게 살다가 몇 년 후, 난 큰 낭패를 보게 된다.
나리타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내가 어쩔 줄 모르고 동동거리자 불쌍해하던 항공사 직원이 다음 날 새벽에 오면 빈자리에 태워 주겠다고 달래주었다. 공항은 문을 닫는다는 소리에, 호텔에 갈 용기도 없고 돈도 아까워서 공항 근처 선술집에서 이상한 오빠들의 이상한 눈빛을 받으며 혼자 밤을 새우고 나서는, 나에게 있어서 "미리미리"는 거의 강박에 가까운 행동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한참을 살면서 여러 일들을 겪어 나가다 보니 요령이 생긴 건지, 내 유전자 속에 잠들어 있던 한국인의 민첩성이 눈을 뜨게 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이곳의 무한한 느려터짐에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은행 ATM에서는 뒤에 줄이 아무리 길게 늘어서 있어도 나 몰라라 기계 앞에서 한참을 꼼지락꼼지락 자기 가방 안을 찬찬히 정리해 가면서 일을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마트에서는 계산을 할 때도 현금으로 지급하는 사람이 아직 많은데, 점원이 " ~엔입니다"라는 말을 하면 그제야 지갑을 꺼낸다. 지폐는 물론이고, 동전 지갑에서 1엔까지 하나하나 꺼내서 꼼꼼히 놓는 걸 뒤에서 보고 있노라면 저 밑에서 뜨거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빨리잇!!!!'
이럴 땐
내가 한국에서는 아무리 느리다고 퉁을 먹어도, 아! 난 역시 "빨리빨리"민족의 일원이구나 싶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왜 이렇게 "빨리빨리"와 "미리미리"가 뼛속까지 스며들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외부 침입이 잦아서?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갖고 있는 나라라서?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인 반도라서?
요즘 내가 한 가지 요인으로 생각하는 게 있는데,
그건, 혹시 한글의 구조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다.
내가 여기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때도, 당연히 모음부터 먼저 시작한다.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애에얘예"의 기본 모음이 암기가 되면, 자음을 비음(鼻音), 류음(流音), 평음(平音)등으로 분류해서, 자음과 모음을 퍼즐 맞추기식으로 학습을 진행한다.
모음과 자음을 초성・중성・종성에 끼워 맞추듯 붙이다 보면 글자가 만들어진다.
이때, 각각의 모음과 자음이 헷갈리거나, 빠른 스피드로 자음과 모음, 그리고 받침까지 퍼즐처럼 맞추지 못하면 읽을 수도 없을뿐더러 느릿느릿 읽다 보면 본인은 물론, 상대방의 짜증을 유발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진 작업이지만 일본 학생들은 이 작업을 처음엔 무척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일본의 문자인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글자 하나하나가 독립되어 있어, 약 50개만 외우면 읽고 쓰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음과 모음을 조합한 한글의 문자 수는 과연 몇 개나 되는지 여러분들은 알고 계신지....
검색을 해 보니, 어떤 친절한 분*이 수학적으로 계산을 다 하셔서 블로그에 올리셨다.(감사합니다!!)
그 개수가 무려 11,172개(자음 19개+모음 21개)라고 한다. 헉.....
일본어와 한국어는, 문법은 유사하지만 문자가 너무나 다른 구조로 되어 있어서, 처음에 한국어가 쉽고 간단해서 학점 따기가 수월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은 한글도 제대로 깨치지 못하고 한 학기가 끝나면 도망치기 바쁘다.
50개의 문자를 천천히 우아하게 구사하는 뇌와 기본 자모 24개로 시작해 자그마치 11,172개의 문자를 재빠르게 조합해 가며 구사하는 뇌의 움직임을 상상해 보면, 뇌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어느 쪽이 "빨리빨리"와 "미리미리"가 필요하게 될지는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는 서너 살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한글로 인해 “빨리빨리”라는 민첩한 속도감과 “미리미리”라는 절묘한 조합력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훈련하고 체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주장해 본다...
라고
다소 소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결국
나는 오늘도
온라인카지노를 "빨리빨리""미리미리"
하지 못해
이렇게
"기리기리"(ぎりぎり [girigiri] 겨우겨우)
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친절한 분: [수학] 가능한 한글 조합의 총개수는 대략 몇 개일까? : 네이버 블로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