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 뀐 놈이 웃는다

내 소리에 놀라서 깼어

by혜준

나는 조용한 새벽에 우아하게 도시락을 싸고 싶다.

아직 해가 뜨지 않는 교교한 어둠 속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도시락에 집중을 하고 싶다.

뭐 무슨 대단한 도시락이라고 집중씩이나.....

나에게는 도시락 반찬의 맛보다 도시락을 싸는 동안의 시간 분배와 도시락통 안의 공간 배치가 하나의 의식(儀式)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요즘 딸이 나의 이런 우아한 시간을 자주 방해하고 있다.

재시험이 있거나(시험 좀 한 번에 통과해라, 아오...), 동아리 활동이 있으면 학교에 일찍 가야 한다면서 새벽에 깨우라고 명령한다.

딸의 명령을 따르자면, 도시락을 만드는 도중에 깨우러 가야 하고 아침을 차려야 하고 또 중간중간에 이거 달라 저거 달라하는 주문에 대응하려면 오롯이 도시락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일찍 일어난 딸은 내가 도시락을 싸고 있으면 식탁에서 폰을 보면서 밥을 먹는데, 평상시는 잔소리를 하지만 지금은 나도 집중을 해야 하니 그냥 모른 척하게 된다.(어우.... 신경 쓰여!)

오늘도 폰을 보며 밥을 먹던 딸이 갑자기

"아! 맞다. 엄마! 나 어제 수업 시간에 졸다가 내 방귀 소리에 놀라서 깼어"한다.

뭐라고? 참 가지가지한다.

"야바이토 오모테(큰일 났다 싶어서), 쉬는 시간에 주변 친구들한테 내 방귀 소리 들었냐고 물어봤는데 못 들었다는 거야. 내 소리에 내가 깰 정도면 꽤 소리가 컸을 텐데......"

(소리는 그렇다 치고 냄새는 어쩔 건데?)

"애들이 너 무안할까 봐 그냥 모른 척해주는 거 아냐?"

내 말이 끝나자마자 딸은 손뼉을 치며 깔깔거린다.

"아니, 근데 한 명은 들었다고 하더라구. 그랬더니 다른 애들이 졸다가 방귀 뀐 나보다 그 친구한테 수업에 집중을 안 하니까 방귀소리나 듣는다고 핀잔을 주는 거야" (좋기도 하겠다.... 웃을 일이냐?)


이 무슨 눈물겨운 우정이란 말인가......

전혀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은 친구를 놀림으로서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방귀 친구가 상처받지 않도록 감싸주는 이 따뜻한 배려와 동정심이 눈물겹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방귀나 뿡뿡 뀌고 자기 소리에 놀라서 깨는 학생이 내 딸이라니......

게다가 그걸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내 방귀 소리 들었냐"라고 동네방네 떠들어 대는 학생이 내 딸이라니.....

남의 집 딸이라면 참 낙천적이고 구김살이 없는 아이라고 하려나.


그런데 남의 딸이고 내 딸이고 간에 자신의 실수나 감추고 싶을 부분을 이렇게 툭 터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조금 멋있긴 하다.

나에게는 부족한 부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난 살아가면서 이런 솔직함이 참 필요하고 부럽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부끄러워할 일을 안 만드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에서 들킬까 봐 감추거나 쭈뼛대지 말고 당당하게 잘못이나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우리 집 방귀 소녀는 일부러 용기를 낸 게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방귀를 커밍아웃한 것 같긴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가더라도 이런 다소 철없는 솔직함이 조금 남아 있는, 그런 어른이 나는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