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쫌 끌린다

아~ 눈부셔

by혜준

오랫동안 써 온 다리미가 고장 났다.

언제 이 다리미를 샀는지 잊어버렸을 정도이니, 꽤 오래 썼나 보다.

다리미 안에 물을 채워 넣으면 슉슉 스팀도 내보내고 무선이라 편하게 다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다리미에 물과 충전지가 들어서인지 무겁고 스팀은 더운 여름에는 오히려 짜증을 유발했다.

그래도 살 당시에는 최첨단이었던지라 그러려니 하고 이제껏 썼던 것 같다.


인터넷으로 살까 하다가 요즘 다리미는 어디까지 진화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서 가전제품 매장으로 향했다.

가 보니 정말 여러 회사에서 나온 여러 종류의 다리미가 진열되어 있다.


옷걸이에 건 채로 다리는 스팀다리미를 본 순간,

아! 맞다

나도 몇 년 전에 사다 놓은 게 있었다.

좀 편하게 다리고 싶어서 샀는데 내가 사용법을 잘 모르는 건지, 힘만 들고 전혀 깔끔하게 다려지지 않아서

고이 모셔둔 게 있다.

요즘은 작고 앙증맞은 스팀다리미가 대세인 듯, 디자인도 예쁘고 색상도 시크한 다리미가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스팀다리미는 아웃!


그중 맘에 드는 게 있어서 가격을 확인하고, 인터넷에서는 얼마일까 검색을 하려고 보니 화면 안에 이상하게 눈에 쏙 들어오는 다리미가 보인다.

아마존에서 별이 다섯 개다.

가격도 내가 사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싸다.

자세히 보니 기능이 아무것도 없다.

줄도 달려 있고 다리미에 물도 채울 수 없어서 스팀도 나오지 않는 그냥 심플 다리미이다.

옛날에 엄마가 쓰던 다리미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 엄마가 다림질하고 나면 옆에 앉았다가, 남은 열로 혼자 손수건도 다리면서 놀던 그 다리미가 생각났다.


남편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사 가지고 가자고 투덜거렸지만, 난 갑자기 이 다리미가 너무 갖고 싶어졌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샀는데 영 아니면 어쩔 거냐고 날 겁주지만, 난 왠지 이 다리미한테 너무나 끌린다.

너......쫌 끌린다.

영 아니다 싶으면 스팀다리미 옆에 고이 모셔둘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주문을 했다.

아기다리고기다리던(이거 아는 분 계실까?) 다리미가 도착했다.

만사를 제쳐두고 헐레벌떡 다림질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개봉했다.


아~ 눈부셔.

반짝이는 광택과 함께 이 날렵한 유선형 몸매라니.

손잡이를 잡으니 손에 착 감긴다.

내가 지금 다리미를 들고 있는 건지, 새털을 들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가볍다.

아까 기능은 아무것도 없다는 제 망언은 잊으시길......

온도 조절 장치가 멋진 다이얼식으로 탑재되어 있다.


다림질판 위에 놓인 딸의 꾸깃꾸깃한 셔츠에 다리미를 올린 순간, 나는 내가 얼음판 위에 있는 줄 착각했다.

이 가볍고 매끄러운 터치......

손길이 닿는 순간, 오솔길 같던 주름들이 고속도로처럼 쫙쫙 펴진다.

다림질 시간이 단축되는 것은 물론이고 힘도 덜 들고 게다가 재미나다.

슉슉 뿜어대는 스팀 때문에 비지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더워서 나중에 다려야지 했던 것들도 다 가져다가 모두 반듯반듯 다림질을 했다.


다림질을 마치고, 새 다리미의 열이 식기를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든다.

고장 난 다리미가 이제까지 제 역할을 다해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편하자고 이것저것 붙인 기능들이 오히려 '옷을 잘 다리는' 다리미의 기본을 방해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역시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걸까.


손바닥으로 식어가는 다리미의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은 쓸데없이 사람에게까지 번진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 기본이 되어 있을까?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바라볼 때 '기능'에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기본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기본이 된 사람으로 기본이 된 사람에게 끌리고 싶다.

다리미 앞에서 조심스레 자문(自問)해 본다.

"너는 기본이 되어 있느냐~?"


요 기본이 되어 있는 다리미, 여러분께도 소개해 드릴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