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좀 꽈악 찼으면......

상여자와의 데이트

by혜준

아주 더운 날이었다.

딸과 하라주쿠(原宿)에 갔다.

며칠 전 딸이 내 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멋대로 예약을 한 모양이다.

한국의 모 의류 쇼핑몰의 팝업스토어가 약 열흘간 하라주쿠에서 개최된다며 일방적으로 데이트하자고 나를 끌어당긴다.

상남자, 아니 상여자일세......


팝업스토어는 하라주쿠와 오모테산도(表参道)가 바라보이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너무 더워서 입장하려 하니 안된다고 한다.

카페에 들어가기는 좀 어중간하고 뙤약볕에 서있기도 힘들어서 바로 옆에 있는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을 산바카라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옛날 아주머니인 나는 옷가게 하나 들어가는데 시간을 예약해야 하고 QR코드를 찍어야만 하는 시스템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젊은이 문화에 질세라, 나 이런 거 이미 다 알고 있는, 나 익숙한 여자...... 표정으로 딸이 하는 걸 옆 눈으로 훔쳐보며 폰을 들이밀어가며 스토어 안으로 들어갔다.


줄을 세우는 언니와 오빠들부터 쭉쭉빵빵이다.

모델 일 하는 분들 중에서 알바를 모집했는지, 상하 블랙으로 맞춰 입은 언니와 오빠들이 매장 안에서 쿨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인사도 하고 안내도 해 주신다.

황송하다.

언니와 오빠들은 깔끔하게 입고 있는데, 매장 안의 많지 않은 옷들은 여러 브랜드로 나뉘어 정리 안된 딸 방의 행거처럼 산만하고 헐렁하게 걸려 있다.

사이사이에 화장품도 조금 놓여 있고, 구석에는 입장객들을 위한 이벤트로 인형 뽑기를 한다고 시끌벅적하다.

단층 건물이라 배치가 어려웠던 것일까.

스토어 내부가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잠시동안은 미아가 된 느낌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아정'코너가 있어서 이만 오천 엔 이상을 구입한 손님에게만 한정메뉴를 선물한다고 한다.

요즘 '요아정'에 빠져 있는 딸은 아마도 이걸 목적으로 이곳을 예약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엄마한테 옷도 얻어 입고 '요아정'도 공짜로 먹을 수 있고.

근데 딸아! 구입액 이만 오천엔 이상이라는 문구는 못 보았느냐?


더운데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딸 꼬까옷이라도 하나 사줄까 하고 딸이 골라든 옷의 가격표를 보고 난 입이 떡 벌어졌다.

이 티셔츠 쪼가리 하나에 뭐....???

이 하늘하늘한 체크의 평범한 원피스가 뭐 얼마???

入場者 한정 20% 할인이라고 하지만, 해도 너무 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이런 브랜드의, 이런 옷을, 이런 가격으로 구입해서 입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솔직히 내가 보고 있던 옷들이 특별히 비싼 원단을 쓴 것 같지도, 디자인이 유니크하지도 않았다.

스토어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남학생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일본의 어느 저가 브랜드를 입에 올리며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평가였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건질 게 없었던지 배가 고팠던지 딸은 나가자고 내 팔을 또 끌어당긴다.

코리아타운이 있는 신오쿠보(新大久保)에 가서 '요아정'을 먹자고 한다.

이만 오천엔 어치의 옷을 못 사서, 못 먹은 '요아정'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

불쌍한 것......

그 소원이야 들어주지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또 우리는 좁고 사람이 넘쳐나는 신오쿠보로 이동했다.

먼저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나마 제일 한국과 비슷한 탕수육을 먹을 수 있는 '홍콩반점'을 향했더니, 어라? 가게가 없어졌다.

프랜차이즈 대표님이 한국에서 좀 시끄럽더니 여기도 문을 닫았나 보다.

내가 사랑하는 '신주쿠반점'은 좀 걸어가야 했는데, 너무 더워서 그냥 탕수육을 먹을 수 있는 가게를 찾기로 했다.

좀 맛있는 곳은 줄을 서 있거나 탕수육이 없거나 해서 조금 헤매다가 깔끔해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오픈 한 지 얼마 안 된 분위기의 가게였다.

들어가서 런치 세트 두 개를 시키고 탕수육을 시켰다.

양이 너무 많으면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사이즈를 물어보니 손바닥만 한 접시에 나온다고 한다.

그럼 둘이서 남기지 않고 먹겠다 싶어서 주문을 했다.

주문을 하고 가격을 다시 보니 1300엔이었다.

엥? 손바닥만 한 크기인데 1300엔이라고?

무지 맛있을까? 새콤달콤하고 바삭한 탕수육을 기대,기대하며 기다렸다.


삼계탕을 시켜 뚝배기에 들어간 닭 한 마리를 산적처럼 뼈를 발라가며 먹고 있는 딸 앞에

드디어 탕수육이 도착했다.

순간, 우리는 얼어붙었다.

이, 이것이 정녕 탕수육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가격을 떠나서 , 생명과도 같은 소스가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찰기라고는 전혀 없는 물과 같은 소스.

게다가 부먹도 찍먹도 선택할 여지없이 눅눅한 튀긴 고기 위에 뿌려진 축축함이라니.

아마도 한국의 냉동식품을 가져와서 그대로 해동시켜 주면 이렇게 되나...... 싶었다.


팝업스토어에 이어 한국 음식점까지 더블 펀치를 맞은 느낌.

나는 괜찮다.

난 한국의 패션과 한국의 음식이 얼마나 멋지고 맛있는지 아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약 내가 소문으로만 듣다가 처음 만난 한국 패션과 음식이 오늘의 이런 것들이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나는 엄지 척을 하며 감탄할 수 있었을까.

겉모양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속내용이 그 겉모양을 따라가질 못하는 느낌......

맛있게 먹는 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딸아, 정말 다행이다. 넌 그래도 외모보다 내면이 훨씬 괜찮은 아이니까.'


한류(韓流)라는 문화가 이만큼 사랑받게 된 데에는 참 많은 사람들의 오랜 시간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걱정이 된다.

지금의 인기에 기대어 '한국'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잘 팔릴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한류가 돈이 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그 화려해진 겉모습만큼 속도 꽉 차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 한국을 만나는 누군가에게는 그 옷 한 벌이 한국의 옷이고, 그 탕수육 한 접시가 한국의 맛일 수도 있으니까.

괜한 걱정일까.


식사를 마치고 '요아정'에 가려는데 딸이 날 불러 세운다.

믿고 먹을 수 있는 '설빙'에 가자고 한다.

더블 펀치가 좀 아팠던 걸까?

땡볕에 줄을 서 있는 손님을 위해 양산을 준비하고 있는 친절한 '설빙'에 줄을 서서 들어갔다.

우리는 인절미 설빙을 주문했다.

'음...... 이 맛이야'

우리 둘은 말없이 두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너와 나의 일체감.

딸은 빙수의 떡을 너무나 사랑한다.

그런 딸이 이 더운 날 데이트에 기꺼이 응해 준 나를 위해 상여자답게 아낌없이 떡을 몇 개나 건네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더웠지만, 우리 상여자의 뜨거운 속마음 덕분에 올여름의 마지막 더위도 이열치열(以熱治熱)로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