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벤또엔 뭘 넣지?

대충 해~

by혜준

9월 아이들 개학과 함께 다시 시작된 도시락 싸기.

요리를 워나~악 잘하고 좋아하는 나에겐 정말 고통이다.

게다가 이번 학기부터는 첨가물이 없는 반찬으로 넣으라는 딸의 엄명이 떨어졌다.

즉, 냉동식품을 넣지 말라는 이야기다.

난 맛은 어떻든 간에 맛있게라도 보이도록 애를 쓰는 편인데,

그러려면 알록달록 반찬 가짓수가 좀 확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고,

내가 아침에 출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냉동식품 하나 정도는 슬쩍 넣어 줘야 나도 숨을 좀 쉴 수 있다.

그런데 첨가물 없는 걸 넣으라니......

차라리 날 죽여라!

아직은 나도 출근을 하지 않으니 아침에 여유가 있지만 9월 중순부터가 걱정이다.


"일본은 급식도 없어? 대충 해~"

언니는 조언해 주지만, 난 대충 할 수가 없다.

물론 완성된 도시락은 대충 한 것과 모양새도 맛도 그리 다르지 않지만......


나는 왜 도시락과 엄마의 애정을 엮어서,

도시락을 소홀히 하면 나쁜 엄마가 된다고 느끼는 걸까?

요리 못하는 나만의 자격지심일까?

일본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싸 주는 도시락을 愛妻弁当([aisaibennto] 사랑이 담긴 아내표 도시락)이라고 부르는 말까지 있다.

도시락이 부부의 애정과도 엮이는 셈이다.


만약 요리나 도시락으로 엄마나 아내 점수를 매긴다면 아마 난 빵점 엄마일 것이다.

죽어도 빵점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아서 정말 난 내일의! 벤또 반찬 하나에 번민한다.

어제는 그거, 그저께는 저걸 넣었으니 오늘을 이걸 넣어 줘야 하나.

오늘 과일은 이걸 넣어 볼까......

아이에 대한 사랑보다는 빵점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몸부림, 발버둥이다.

도시락에도 아이에 대한 나의 애정보다는 엄마로서의 바카라임이 더 많이 담겨지는 것만 같아 미안하다.

그 바카라임을 애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리 대신

밖에서 돈 많이(?) 벌어서 맛난 거 사 먹으라고 돈을 넉넉히 주는 건 엄마의 사랑이 될 수 없을까.

만약

이 세상이 그것도 엄마의 사랑이라고 인정해 준다면, 난 매일 도시락 반찬을 고민하거나 새벽에 벌떡 일어나 분주하게 프라이팬을 들고 동분서주하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가끔

아이들이 자립을 하고 나서야 진정으로 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말과 행동이

아이들의 인생에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지점에 왔을 때, 난 아이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의 나에게는

아이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제대로 서포트해야 한다는 바카라임감이 너무 커서, 따뜻하고 편안한 애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철저한 사람도 못 되니 그 슝슝 뚫린 빈틈으로 우리 아이들은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그 빈틈이 내 육아 불안의 근원일지도).

달걀말이 정도만 새로 하고 전날 먹던 반찬 대충 넣어 싸 준다는 여기 엄마들의 말을 들으면, 그 '대충'이 너무나 부럽다.


그나저나 내일은 뭘 넣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