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에타악~세에타악~

이미 세탁물을 맡기셨습니다

by혜준

"세에타악~세에타악~"

한국에 살던 아파트에는 이렇게 노래처럼

세탁을 외치시며 세탁물을 회수하던 아저씨가 오셨다.

40여 년이 지나도 그 목소리는 잊히지 않는다.


"아! 아저씨이~"

엄마가 아저씨를 부르라는 소리에

내가 헐레벌떡 현관문을 열고 아저씨를 불러 세우면,

계단을 오르시다가 싱글싱글 웃으시며 들어와

세탁물을 받아 가시곤 했다.


아저씨는 세탁을 마친 옷들을

친절히 가져다주시면서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엄마는 아저씨에게 대금을 치르면서

수고하신다며 음료수를 건네기도 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며 웃던 하회탈 같은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어제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할

아이들 교복이 든 세탁 가방을 메고

집 앞 세탁소에 갔다.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뭔가 싸한 분위기에 몸이 움찔했다.

가게를 들어가면 기계적이긴 해도 들리던

밝은 목소리의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가 없어서였을까.


연수생이라는 명찰을 달고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여성과

마치 사감 선생님처럼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은 무표정의 중년 여성이

나를, 아니 내 세탁 가방을 맞이했다.


'매뉴얼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연수생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을까.

베테랑 사원은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내가 가져온 옷들을 집어 들고 하나하나 확인했다.

나도 그 단호함에 질세라

"하이! 하이!"하고 절도 있게 대답했다.


그 세탁소는 회원제라서

정기적으로 할인 엽서가 오곤 하는데,

계산이 어두운 나는

어느 시기에 엽서가 오는지 아직도 파악을 못하고 있다.

언젠가 할인 엽서가 집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세탁물을 맡기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친절한 점원은

이제 곧 엽서가 댁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면서,

가게에 있는 할인 엽서를 일부러 꺼내서 세탁비를 할인해 주었다.

참 고마웠다.

세탁비가 조금 싸게 된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그 자상한 배려가 기뻤다.


베테랑 사원이 계산을 마친 영수증과 함께

할인 엽서를 불쑥 내민다.

엽서를 들여다보니, 9월 1일부터 할인이 시작된다.

2,3일 후에 맡겼으면 할인 혜택을 받는구나......

순간,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좀 있다가 맡길걸......'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생각을 읽은 걸까.

그 베테랑 사감 선생님이

"이미 세탁물을 맡기셨습니다"

라고 칼 같은 한마디로 내 미련을 싹둑 잘라낸다.

네?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당신은 독심술가?

아마 내가 엽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의 다음 대사가 읽혔나 보다.

죄송한데요, 전 그런 말할 주변머리도 없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어디서도 가격 흥정을 못한다.


"아, 하, 하이......"

하고 돌아서는데 뭐지? 이 기분 나쁨은??????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엄마 화났어?"한다.

얼굴에 쓰여 있나 보다. 기분 나쁜 감정이......

베테랑 사원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고

나 또한 기분 나쁠 일이 하나도 없는데

왜 기분이 나쁠까?


내가 일본의 친절함에 너무 익숙해져서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야말로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그 뻔뻔한 마음일까.

마음 같아서는 할인이고 뭐고

세탁물을 돌려받고 다른 세탁소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왜 화가 나는 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감 선생님에게 독심술로

감추고 싶던 내 마음을 들켜 버린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할인이 안 된 몇 푼 세탁비가 아까워서였을까.

내가 쪼잔하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뭐지?


"이미 세탁물을 맡기셨습니다"

라는 말이 뱅글뱅글 맴돈다.

만약 사감 선생님이 그 말 대신에

"할인 엽서 아직 못 받으셨어요?"

라고 차갑게라도 내게 물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게으른 나는

"아, 괜찮아요. 그냥 해 주세요"

라고 웃으면서 대답했을 것이다.

그럼 지금과

똑같이 세탁물을 맡기고

똑같이 돈을 내고

똑같이 집으로 돌아왔을 텐데.

그럼 아들도 "엄마 화났어?"라고 묻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나는 할인보다도 선택권을 받고 싶었던 걸까.

지금 맡길지, 며칠 뒤에 다시 올지.

아마 선택권을 받아도 그냥 맡겼을 주제에

선택할 기회는 갖고 싶었나 보다.

나도 참 사감 선생님 뺨치게 깐깐하다.


"세에타악~세에타악~"

하회탈처럼 웃던 세탁 아저씨가 그리워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