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맛있겠다

진짜 먹고 싶어?

by혜준

딸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이사 온 이 아파트에는

딸과 같은 나이의 W짱이 살고 있었다.

세 자매 중 둘째인 W짱은

그때부터 똑소리가 날 만큼 다부진 아이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W짱도 딸도 자기가 원하던 중학교에는 떨어지고,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곳은 중고등학교 6년간 과정이 일관된 학교라서

결국 두 아이는

초중고 12년을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지금

이 두 아이의 상황은 아주 재미있게 달라져 있다.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고 했던가.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표를 받으면 바꿔 보자고 할 만큼

경쟁심이 강한 W짱은

지금 이른바 명문대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고,

바꿔 보기 싫어서 도망 다니던 우리 집 털털이는

아직도 학원 자습실에서 도망 나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능하면 아주 편하게 가고 싶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처음엔 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못하면 할 수 없지만

왜 도전조차 하지 않는지 답답했다.

그리고 W짱에게 지는 게 분하지도 않나......

이렇게 노력하지 않고 편하게 살게 해도 되나.......

부모로서 뭔가 도전과 경쟁의 중요성에 대해서

조언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갈등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와 딸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나에게는 딸에게

조언을 할 자격 따위가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때론 불안하고 외로워도,

무엇보다 일본이나 한국의

그 치열한 비교와 경쟁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게으른 안도감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의 위치를 의식하게 되는

위와 아래, 이기고 진다는 구도.

나는 그런 환경이 너무 힘들다.

누가 뭐라고 부추기는 것도 아닌데

괜히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그 느낌이 너무 싫다.

그렇다고

경쟁 구도에서 과감하게 도망칠 용기도 없다.


그래서 난 여기서 이도저도 아닌

전전긍긍하는 삶을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다시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모든 현실을 무시하고

당당하고 멋지게 내 삶을 지켜낼 자신도 없다.


이기고 싶다기보다는

지지 않게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위에는 또 그 위가 있고

그때마다

절망을 느끼는 것이

너무 아파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솝 우화 속,

저 높이 매달린 탐스러운 포도를 포기하며

"저건 어차피 시큼하고 맛없는 포도일 거야"

라고 투덜대던 여우의 뒷모습에서

딸과 내가 겹쳐 보인다.

그 여우와 딸, 그리고 나의 모습이

어쩐지 비겁하게만 느껴진다.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쉽게 딸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여우들이 보지 않을 것만 같은

포도를 발견하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아주 아주 작고 초라한

여우와 딸과 내가

저 멀리서 보인다.


부디

우리가 새로운 포도를 어렵게 발견하기를,

그 포도를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를,

적어도 그 포도를 보면서

"이 정도면 됐지"라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를......


그렇게 되면

지금 저 멀리 보이는

작고 초라한 여우와 딸과 나도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