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 보고

속아 보자

by혜준

'이거 또 연기 아냐?'

마음속으로 경계막을 치며, 딸이 이끄는 대로 딸 방 침대에 마주 앉았다.


어제 오후에 갑자기 "띨롱~" 내 폰으로 날아온 사진 한 장.

딸이 친구랑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길거리에 있는 거울을 향해 갸루 피스를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옷을 보니 아침에 입고 나간 옷이다.

어라????

학원 자습실에 있어야 할 시간에 넌 어디를 또 몰래 빠져나갔다가 들어온 것이냐......

점심때 친구를 만나 노닥거리다가 오후에 자습실에 다시 들어가서는 친구에게 보낼 사진을 실수로 나한테 보낸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비밀이 있을 줄 알았더냐.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라.

아..... 이런 말을 내가 딸에게 하게 될 줄이야.

화도 안 나고 그저 슬프기만 하다.

교묘하게 뒤처리도 못하면서 겁도 없이 엄마 속이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딸이 애잔하다.


사진이 보내진 후, 평소에는 단답형의 LINE(일본의 카톡)에 갑자기 장문의 명대사가 줄줄 이어진다.

어쩌고 저쩌고......

이거 쓸 시간에 공부하자......

이 한 마디만 LINE에 남기고 나는 딸의 이 행동을 어찌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놓고 나중에 보고하거나, 궁지에 몰리면 반성보다 사과부터 하고 보는 버릇을 어떻게 일러 줘야 할지 막막했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로서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담담한 논리적 연설형 주의법, 버럭 호통형 주의법, 감정에 호소하는 감성형 주의법, 널 이해한다는 공감형 주의법 참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딸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해낸다는 욕망이 무엇보다 큰 것 같다.

전혀 먹혀들지 않는 주의법은 집어치우고, 결국 본인이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주의하지 않으면서도 본인이 스스로 깨닫게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냥 내버려 두고 기다리기? 그러다 못 깨달으면?

또 불안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생각하다가 지쳐 버린다.

아, 나도 몰라......

좀 넋을 놓고 있다가 에너지가 생기면 다시 생각한다.

또 지친다.

아, 나도 몰라......

딸이 저녁 8시 반쯤 귀가할 때까지 이 짓거리를 반복하다가 "띵똥~"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딸이 날 보자마자 팔에 안긴다.

'우뛰...... 저리 가!'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팔을 딸에게 맡긴 채 생각한다.

이를 어쩐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부모의 행동인지 누가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걸 이젠 안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평소처럼 밥을 챙겨 먹이고 목욕하라는 재촉을 하면서도 나는 생각한다.


목욕을 하고 나온 딸이 이끄는 대로 침대에 마주 앉은 나는 딸을 바라본다.

딸도 날 지긋이 쳐다본다.

연기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니, 믿어 보자.

자기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 아이가 처음으로 내 손을 이끌어 자기 방으로 데려왔다.

자기 침대에 날 앉혀놓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믿어 보자.


딸은 말했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고 했다.

자신이 여러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타인도 저마다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이제껏 몰랐다는 것이다.

보통 다섯 살 쯤이면 안다고 들었는데, 자기는 그걸 몰랐던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되니, 사람을 대하는 게 조금 무서워졌다고 한다.

이제까지 엄마는 엄마라는 역할의 사람, 친구는 친구라는 역할의 사람, 선생님은 선생님이라는 역할의 사람으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난 그 말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이게 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까지 의아했던 것들이 수수께끼 풀리듯 풀렸다.

딸이 중학교 입학시험의 결과를 보고 나서의 행동이 나는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졌을 때나 붙었을 때나 너무나 담담했기 때문이다.

실망에 고개를 떨구면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입 꼭 다물고 있던 어두운 표정의 딸이 기억났다.

합격 발표에 환호하는 나를 상당히 쿨한 표정으로 보던 딸의 얼굴도 기억났다.

그리고 그건 자기 일이라고 하던 딸의 냉정한 말도 물론 기억한다.

나는 이 아이를 상당히 어른스럽거나 침착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바카라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영화를 보면서 눈가가 빨개지던 아이가 자신의 감정은 알지만, 상대방도 자기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걸 불과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응????? 잠, 잠깐만!!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중요한 감정의 이야기를 지금 꺼낸 거지?

요 지점이 조금 수상하긴 한데......?

과연 딸의 말은 엄마의 꾸지람을 피하기 위한 거짓이었을까, 진실이었을까.


하루가 지난 지금, 난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알게 된 건 있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의 감정조차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딸에 대한 내 감정이 사랑인지, 불안인지, 분노인지, 슬픔인지, 애잔함인지, 서글픔인지......

아니면, 전부 다...... 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