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카드 두 장

엄마가 브레이크를 밟는 이유

by혜준

나는 그렇다.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조언과 위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힘이 되지만,

나 스스로를 다시 일으키는 데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어디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너도 힘들구나. 나도 무지 힘들어. 우리 이거 언제 끝날까?"

하고 서로 잠시 어깨동무라도 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읽고 힘을 내 주셨으면 한다.

오늘 이야기는 그런 마음으로 쓰고 싶다.


그저께였다.

딸에게 학교 갈 시간 되었다고 재촉을 해도 짜증을 부리며 미적거리더니, 결국 학교 동아리 활동 시간에 지각을 해서 동아리 고문 선생님이 전화를 하시게 하고, 놓고 간 노트북으로 계속 "띨롱띨롱" 동아리 친구들의 메시지 알림이 오게 했다.

약속 시간 엄수의 내 옐로카드에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딸은 굳게 다짐했었다.


그런데, 어제 일이다.

오전 동아리 활동이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학원을 가겠다며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에게 선포를 하더니, 결국 동아리 활동 후, 친구와 점심을 사 먹고 빈둥대다가 학원도 가지 않고 학원 끝나는 시간을 교묘히 맞춰 집으로 왔다.

학원에서 전화 온 것도 모르고, 마치 학원에서 이 세상 공부를 혼자 다하고 온 듯한 피곤함을 온몸으로 연기를 하더니, 내가 "너 학원 갔다 온 거야?" 하는 한 마디에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둥, 학원에 전화한 거냐는 둥, 이번엔 아주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여고생으로 혼신의 메소드연기를 펼친다.

이 정도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감이다.


이어지는 호된 내 설교와 두 번째 옐로카드를 딸이 별 반항 없이 넙죽이 받아 퇴장한 이유는, 다음날 있을 여름의 풍물시인 花火大会([hanabitaikai] 불꽃놀이 축제)에 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엄마한테 금일봉이 쥐어져야 屋台([yatai] 노점)에서 焼きそば([yakisoba] 야키소바)도 먹고 かき氷([kakikori] 빙수)도 사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불꽃놀이는 오후에 가니까 오전 중에 학원에 가서 자습을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공부보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기 편한 대로 규칙을 멋대로 어기는 그 태도를 엄하게 꾸짖고 있는데 딸은 아직도 엄마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엄마 닮아 둔순이.......?


그러더니 오늘 막상 아침에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엄마, 나 학원 안 가고 거실에서 공부하면 안 돼?"이다.

뭐라고? 공부를 하고 안 하고 가 아니라고!!

귀에 피가 나도록 자기와 한 약속, 누군가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서 바카라임을 지자고 그렇게 일렀고 멀쩡한 얼굴로 알았다고 하더만...... 도돌이표 정말 싫다.

내 입에서 곱고 나긋나긋한 말이 나올 리가 없다.

그렇지만, 맹세컨대 나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아침잠이 덜 깨 비몽사몽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아들이 증인이 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나......

나는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말했을 뿐이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이른바, 逆ギレ([gyakugire]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격)이다.

엄마는 부드럽게 말하면 되지 왜 화를 내냐며 딸이 갸쿠기레를 한다.

응? 나 화낸 적 없거든?

본인의 요구에 웃으면서 "그렇게 하렴"하고 응하지 않으니 덮어씌우기인가!

예전 같으면 '내가 그랬나?' 하고 일단 움찔해서 읽어 둔 육아서를 떠올리며 다소 저자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안 그런다.

딸은 자기 예상이 어긋난 것에 대한 분풀이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여기서 내가 나를 못 믿고 딸의 요구를 계속 받아들이게 된다면, 딸은 다른 누군가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자기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거나 그게 안 될 때는 갸쿠기레를 할 수도 있다.

본인이 먼저 약속을 어기려는 것을, 내 말투를 트집 잡아 자기감정을 드러내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내가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다.

언젠가 딸이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편하게 생각하는 상대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지 못하도록.


내가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라는 한마디로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자, 딸은 시간에 맞춰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학원으로 갔다.

그리고, 나는 딸이 11시에 귀가해서 점심 먹고 화장하고 옷 갈아입고 나간다는 본인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지금, 이 더운데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뽀얀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의 렌즈를 넣은 해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정중히 인사를 하고 신나게 집을 나서는 딸을 배웅하고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휴우......


만약에 딸이 끝까지 자기 고집대로 학원을 가지 않고 방에서 에어컨을 빵빵 틀어놓고 이불에 몸을 뚤뚤 말아 폰을 보며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면.......

그러고 나서 불꽃놀이 간다고 세면대를 장악해 가며 느릿느릿 치장을 하는 꼬락서니를 봤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그 修羅場([syuraba] 아수라장)은 생각하기도 싫다.


귀가 시간은 9시까지로 협의했으니,

부디 이번만큼은 약속을 잘 지켜서

내 입에서 레드카드가 나오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

딸이 잠자리에서

오늘 저녁에 본 환상적인 불꽃놀이의 여운을

행복한 마음으로 즐기길 바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