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쥐는 방식

바른 것보다 중요한 것

by혜준

기말고사 기간이다.

시험 감독을 하면서 내가 습관처럼 하는 작업이 있다.

부정행위를 예방하는 시험 감독 역할이 우선이므로

교실 분위기가 집중 모드로 차악 가라앉는 시점에서

내 작업은 조용히 시작된다.


언제부터 이 작업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왜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취미라고 해야 하나?

재미있고 흥미롭기 때문에 한다.

물론 대단한 작업은 아니다.

다들 들으면 피식 웃을 만큼 하찮고 가벼운 작업이다.


그 작업이란,

연필을 쥐고 있는 학생들의 손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연필을 쥐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 특별한 게 있어?

하시는 거기 계신 그대여.....

정말 우리 인간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다들 연필을 개성 있게 쥐고 있답니다.


이른바

연필을 바르게 쥐는 법이라는 게 있다.

한국에서도 아마 가르칠 것이다.

아니, IT강국인 한국은 연필 쥐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이미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하려나?

키보드를 빨리 익히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다.

하긴 일본에서도 연필 쥐는 법보다는

젓가락 쥐는 법에 더 진심인 건 확실하다.


암튼

나의 연필 쥐는 법 관찰 초기 단계에서는

연필 쥐는 법과 성적 및 수업 태도와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해 논문을 써 볼까......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요즘엔 학생들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다른 상념이 떠오른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연필을 쥐고 쓰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우리들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살포시 겹쳐진다.

그래서 과연

바르게 연필을 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바르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뱅글뱅글 맴돈다.


확실히

연필을 바르게 쥐면 학습의 효율과 성과는 오를 수도 있고

세간의 기준에 따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

부와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자기 나름대로

연필을 단단히 쥐고 집중해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것,

신념을 단단히 품고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당연해서 식상하고 상식과 같은 이런 생각을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 내 스스로 깨닫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안다.

이제야 마음과 몸이 움직인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그리고 내 학생들에게

내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며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이제 겨우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앞으로 남아있을 시간 동안

나는 시험 감독을 하면서

또 어떠한 관찰 작업을 통해

어떠한 상념에 빠지게 될까......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지와 함께

나도 늘 내 새로운 질문에 대한 답을

꼼꼼하게 채점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