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약속이라는 공부

너와 나 그리고 서로의 시간

by혜준

암행어사가 따로 없다.

수업 중에 앞문을 기세 좋게 활짝 열어젖히고는

한 손에는 코딱지만 한 "지연증명서"를 펄럭이며

또 한쪽 손에는 카페에서 방금 산 커피를 들고 등장하는 녀석이 있다.(커피 살 시간에 빨리 오지?)

전철이 지연을 했으니 자기의 지각은 정당하다는 무언의 주장이리라.

하지만 나한테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저 뒷문으로 다시 조용히 들어와"

30여 명이 되는 다른 친구들은 다 제시간에 왔는데 너만 이렇게 늦게 오는 건 도대체 어떤 전철을 타고 오는 것인지...... 은하철도 999라도 타고 오는 게냐?


나는 결석보다 지각이 더 싫다.

결석은 사람이 살다 보면 몸이 안 좋다거나 급한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학생 정도 되었으면 수업과 자기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요령이고 삶의 지혜이다.

하지만, 지각은 다르다.

물론, 지각도 오는 도중에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런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으면서 습관처럼 지각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 못해 한심해지기까지 한다.

누군가를 아래로 내려 보는 것은 정말 경멸해야 할 행동이라는 걸 알기에, 나도 모르게 지각하는 학생을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 정말 참기 힘들다.


며칠 전의 일이다.

수업을 하려고 보니 결석 한 번 지각 한 번 안 하고 수업 열심히 잘 듣던 여학생 세 명의 자리가 비어 있다.

결석인가...... 하고 수업을 진행하면서 문득 창 밖을 내다보니, 그 세 명이 반대편 식당 건물에서 어슬렁어슬렁 이쪽 건물로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오늘은 수업을 빼고 셋이서 놀려나 보다...... 더운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했다.

다음 주에 오면 "선생님은 너희들이 수업 제치고 노는 걸 봤도다...."하고 농담해 주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

잠시 후 이 세 명이 싱글거리며 교실 문을 열고 들어 오는 게 아닌가?

수업 개시 30분 후였다.

이 아이들에게는 지각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았다.

왜 지각을 하면 안 되는지, 본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지가 전혀 없지 않고서는 그렇게 웃으면서 들어 올리가 없다.


나도 그랬다.

어릴 땐 누군가와 시간 약속을 하고 조금 늦더라도 별로 미안한 감정을 갖지 않았다.

그때의 내 논리는 나는 상대방이 늦어도 올 때까지 화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조금 늦는 것 가지고 화를 낸다면 그건 그 사람의 속이 좁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의 엉터리 논리.

얼마나 자기 위주의 답답한 생각이었는지.....

어디 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시간의 소중함, 내 시간보다 상대방의 시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몰상식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초보 강사시절엔 지각하는 학생이 있어도 "늦으면 네 손해지....." 하는 생각에 체크도 하지 않고 자기 바카라임이라는 걸 강조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무엇이 중요한지.

시간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지키는 것에 있지 않다.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역산해서 어떤 타이밍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하며, 그 행동이 다소 귀찮고 하기 싫더라도 참고해야만 하는 바카라임과도 관련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약속을 한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으면 좀처럼 정확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따라서,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위의 사항 중 어떤 것을 혹은 전부를 소홀하게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고, 그게 얼마나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달은 이상,

내 학생들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방관하고 싶진 않았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학보다 학력보다 중요한 것은 강사가 아니라 지나가는 아주머니라도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난 중요한 공부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학생들을 타이른다.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이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껏 누구에게도 주의를 받지 않고 컸다는 것이므로 지금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다.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는 내가 학생들의 머릿속까지 따라 들어갈 수 없지만, 설령 지금은 오지랖이라고 삐쭉댈지 몰라도 언젠가 이들이 내 말을 이해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내가 학부모로서, 적어도 내 아이들이 이런 잘못을 했을 때 따끔하게 혼을 내줄 수 있는 선생님이 가까이 계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기 때문에 미움을 좀 받더라도 난 잔소리를 한다.


이런 나에게 일어난 오늘 아침의 일이다.

어제부터 감기 몸살이 너무 심해서 온몸이 아프고 목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수업을 휴강할 수는 없어서 약을 먹고 마스크를 쓰고 무사히 마쳤다.

다행히 오늘은 마침 보강기간으로 수업이 없는 날이라, 아이들 아침을 챙겨 놓고 너무 몸이 좋지 않아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학교 갈 시간인데......"라고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보니 딸의 등교 시간이 10분이 넘었는데 아직 집에 있는 것 같다.

벌떡 일어나 거실에 가 보니 딸이 아침을 알차게 먹고 학교 갈 준비도 안 하고 소파에서 폰을 들고 앉아 있다.

"너 뭐 하는 거야?" 비몽사몽이라 말을 골라하기도 어렵다.

"아직 괜찮아!!!!!!" 하면서 도리어 딸이 쀼루퉁해서 일어나더니 겨우 학교 갈 채비를 한다.

몸은 후들후들 하는데 그걸 모르는 딸은 부드럽게 이야기하지 않는 엄마가 야속하겠지......

겨우 시간에 맞춰 나갔다 싶어서 두근대는 속을 달랠 겸 앉아서 커피 한 잔 내려 마시고 있자니,

10분 정도 지나서였을까?

딸칵......

현관 문소리와 함께 딸이 들어온다.

충전해 놓았던 컴퓨터를 놓고 가서 다시 돌아왔나 보다.

너무나 기세 당당히 들어와 컴퓨터를 채가듯이 들고나가는 딸을 보니 어이가 없다.

이런...... 지각은 따 놓은 당상이네. 화낼 기력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8시 40분에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전화를 들고 보이지도 않는 선생님을 향해 굽신굽신 허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그리고 부탁에 부탁을 거듭했다.

"선생님, 제발 따끔하게 혼 좀 내주세요"라고.


너 오늘 집에 오기만 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