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립스틱

가식이라 생각했던 것들

by혜준

내가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지는 20년이 넘는다.

그전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빨간 립스틱만 하나 바르고 다녔었다.

화장을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지만,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걸 느끼지 못했고

화장한 얼굴보다

화장하는 나 자신이 더 어색했다.

주위에서는 자꾸 해봐야 메이크업 실력이 느는 거라고 했지만,

귀찮았고 해도 의미가 없는 시간 낭비와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했다.

대학 1, 2학년까지는 すっぴん([suppin] 노메이크업)으로 버텼지만,

주변에서 화장을 안 할 거면 립스틱이라도 바르고 다니라고 성화여서

할 수 없이 맨얼굴에 빨간 립스틱만 바르고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는

베이스만 가볍게 하고 입술만 빨갛게 발라

마치 화장을 한 것 같이 눈속임을 하며 다녔다.


이런 내가 빨간 립스틱마저 바르지 않고 다니게 된 이유는,

유학을 와서 만난 당시 선배였던 남편 때문이었다.

"니 나한테 잘 보이려고 립스틱 바르는 거면 앞으로 바르지 마라"

언젠가 점심을 먹고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가 나한테 툭 던진 한 마디였다.

그땐 그에게 연애 감정이나 이성적 호감은 제로였던 때였다.

사귀는 사이였어도 웃기는 이야기인 데다가,

뭔가 문맥이 있거나 전후 맥락이 있어서 이 말을 들었다면

무슨 반박이나 대꾸를 했으련만

갑작스러운 뜬금없는 이 말에

난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뭐지? 이 남자?'

'자기가 뭔데?'

'내가 왜 자기한테 잘 보이려고 립스틱을 발라?'

'아니거든요!'

'미친 거 아님?'

'별......'

머릿속에 온갖 말이 빙글빙글 돌건만 나는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땅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그리고 분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지 못하게 되어 버렸고,

면세점에서 습관처럼 사 모은 다수의 빨간 립스틱은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갔다.

결과적으로 선배를 위해 바른 립스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 그를 위해,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이제야 나는

그때 내가 왜 바보처럼 아무 반박도 못하고

립스틱을 못 바르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의 말은 내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당시 나에게 있어서 립스틱은

그가 아니더라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연출 도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걸 훅하고 건드린 그가 얄밉기도 했지만 부정할 수 없었기에

아마 그 이후로

나는 립스틱을 바르지 못하는 色気([iroke] 매력, 요염함)가 없는

털털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점점

나의 마음에도 色気가 없어진 것 같다.

예뻐 보이는 것보다, 정당해 보이는 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게 된 것 같다.

납득되지 않는 행동은 모두 '가식'이라 이름 불렀고,

그 단어 하나로 나는 사람을 판단했고

나 자신도 심판했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고립된 섬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내가 있었다.

그런 내가 아주 싫지는 않지만,

이제 조금은 나 스스로를

'가식'과 '위선'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두지 말고

좀 더 편안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을 바라볼 때도 '가식'과 '위선'이 느껴지면

멋대로 높은 담을 쌓던 고질병도 조금은 치료를 하고 싶다.


립스틱을 하나 사 볼까......

나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도 아닌

나를 위한 립스틱을.


찬찬히 시간을 들여

나에게 어울리고 내가 바르고 싶은 색으로

정성껏 선택한 립스틱을 바르면,

내 얼굴도 내 마음도 화사해져서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도

진심으로

환하게 웃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