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마음
지난 주말에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서 별로 접해 본 적이 없는 캐릭터의 소유자와 만나 영혼을 탈탈 털렸기 때문이다.
어디에 서류를 낼 일이 있었는데 중간 관리자인 그분이 내 서류를 검토하고 나서 나에게 수정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서류는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 형식이 아니었고,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서 제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중간 관리자가 굳이 내 서류를 검토할 이유가 없었다.
제출 기한이 아직 많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출 전에 자기가 검토해 주겠다며 마감 날짜를 앞당겨가며 서류를 재촉했다.
서둘러 제출을 했더니 이번에는 또 만나자고 한다. 만날 이유가 딱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내 스케줄은 묻지도 않고 자기의 형편에 맞는 날로 정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다.
난 주중에는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양해를 구해, 주말 토요일로 Zoom미팅을 제안했다.
초면이었다. 메일이나 전화로는 두어 번 연락을 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미리 선포하시더니, 그때부터 애정과 관심이라는 미명하에 내 서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보다 더 정교하고 탄탄하고 흠이 없는 서류를 제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바쁘지만 일부러 귀중한 시간을 내어 네 서류를 읽고 지적하는 것이니, 너는 조용히 그리고 재빠르게 내 귀중한 말을 메모해 가면서 잘 들어라"라고.
그분은 내가 자신의 배려에 굽신거리며 감사의 눈물이라도 흘리길 원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신은 지나치게 겸손하다"는 말로 둘러 표현했지만, 결국 그분이 하고 싶은 말은 "너는 틀렸고 내가 맞다"의 끊임없는 반복이었다.
한 순간에 내 마음의 벽이 3000미터 높이까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처음 쓰는 서류도 아니었고, 이제까지 별 탈 없이 제출했는데 갑자기 이분은 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과 내가 살아온 길과 환경과 경험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수정이 아니라 부정을 하는 듯한 말들이 이어졌다.
처음엔 내 불찰이고 내가 이제까지 너무 안이하게 살아왔나......하는 생각에 작아졌다.
프로 의식이 부족한 우물 안 개구리였나...... 하는 생각에 몸이 경직되고 사고가 정지되었다.
다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은 있었다.
'이거 뭐지?'라는......
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확고한 기준이 있다.
하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도저히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내 감정을 자주 의심하는 편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예를 들어 화가 난다거나 짜증이라는 감정이 올라왔을 때, 바로 표현하는 게 어렵다.
"이거 내가 화를 낼 만한 일인가? 다른 사람들은 허허 웃으면서 넘어갈 일을 나 혼자 너무 속좁게 오버하는 거 아닌가"
하고 일단 눌러 놓고 본다.
그리고 이 눌러 놓은 감정이 어느 순간 터지기도 하니 참 괴로운 노릇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그냥 네네......하고 듣고 있으니 그분은 점점 더 열성적으로 나에게 어드바이스를 주시는 듯했다.
이것까지 고치라고?????
'네, 네, 네'가 점점 왜? 왜? 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분이 설정한 무료 Zoom이 끝나고도 이야기가 이어져 내가 전화를 걸어야 했고 그 전화로 또 장장 20분이나 귀에서 피가 나도록 수정 사항을 들어야 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해졌다.
이거 화를 내도 되는 상황인가 아닌가를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 본인의 시간을 써 가면서 검토해 일러 주시는데 화를 내는 건 인간적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서 소위 '마운팅'을 하며 나를 누르려는 그 속내가 보여 분노가 치밀었다.
감정은 일단 눌러 놓고 이 서류를 고쳐 제출할까 말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 서류를 내려고 하며, 내고 나서의 상황을 냉정히 생각해 보았다.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어서 선택은 쉽지 않았다. 과연 마음고생을 해가며 진행시킬 의미가 있을까.
어찌해야 하나......
고민 끝에 나는 서류를 내지 않겠다는 정중한 거절의 메일을 보냈다.
그분에게는 내가 수정을 못해 도망, 회피하는 비겁자로 보이진 않을까 해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서 제출한 다음에 멋지게 거절할까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기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에 솔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일을 보내고 나니, 한참 동안 마음속의 뿌옇게 흐렸던 느낌이 사라지고 가볍고 밝아진다.
그리고 아까 한쪽으로 꾹 눌러 두었던 감정을 살며시 놓아두니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화가 난 순간에도 내 감정보다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있었다.
그분의 속사포 같은 말을 딱 자르지 못하고 거짓 웃음으로 듣는 척을 하고 있었으며, 내가 혹시 그분의 호의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를 줄곧 의심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내 감정은 늘 맨 마지막 차례이다.
왜 나는 내 감정을 믿지 못할까.
왜 나는 언제나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필까.
내가 감정에 솔직해질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약한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인연을 나 스스로 뻥! 차버려 허탈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적어도 내 감정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