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転倒)된 하루

주객전도, 상하전도, 전후전도, 그리고...

by혜준

어제는 딸아이가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대학의 오픈 캠퍼스가 있던 날.

4월에 미리 예약을 해 두었는데 딸아이가 토요일 학교 수업이 있다는 걸 깜빡했다.


오픈 캠퍼스는 오후 5시까지 하니까 학교 끝나고 바로 대학교로 오라고 했더니

딸은 학교에서 수학 보강수업이 있고, 끝나면 친구와 만나서 시부야에서 밥 먹을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럼 보강은 어쩔 수 없고 친구는 다음에 만나면 어떻겠냐고 하니 언짢아한다.


이번 오픈 캠퍼스는 규모가 크고 선생님들의 강의나 여러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어서 학교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냥 취소할까 하다가 1년에 한두 번 밖에 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대충 학교에 대해 조사하는 것보다는 "百聞は一見に如かず"([hyakubunwa ikkenishikazu]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가서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의 인상을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할 수 없이 나 혼자라도 가기로 마음먹었다.

노쇼도 양심에 찔리고...

다른 프로그램보다 재학생 선배의 1대 1 진학 상담이 궁금했다.

자료나 입소문보다는 구체적으로 어떤 학생들이 어떻게 준비해서 입학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 본인의 대학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어떤 자세로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참한 2학년 선배언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언니는 본인이 실제 면접에서 준비했던 자료도 보여 주고, 참고 서적도 가르쳐 주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학교에 대한 애정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강사로서 학생을 대할 때의 나와 엄마로서 학생을 대할 때의 내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모르는 것을 배우는 자세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도 어떻게 상대에게 접근해야 할 지도 다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런 게 主客의 転倒라는 것인가.

정작 이 자리의 주인이어야 할 딸이 아니라, 손님인 엄마가 전도되어 내가 주인 자리에 앉아있고,

가르치는 입장이었던 내가 한 수 배우는 입장으로 전도되고...

부디 이 고마운 2학년 언니와 우리 딸아이가 후년에는 같은 캠퍼스에 있기를 맘 속으로 기원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이런 학교라면 진학을 해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과 이런 기쁜 소식을 딸아이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깡충깡충 집에 왔다.


현관에 들어선 순간, 내 몽글몽글했던 마음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딸아이가 세면대에서 화장을 하며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 시각은 오후 4시.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보강도 안 가고 집에 와서 아빠와 점심을 먹고 나서 내내 빈둥거렸다는데, 그럴 거면 오픈 캠퍼스는 왜 같이 안 간 거지?

친구랑은 보강 끝나고 나서의 점심 약속이 아니었니, 지금 나가서 언제 집에 오냐고 하니, 딸이 말하길 자기는 점심 약속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엄마가 멋대로 생각한 거라며...

말을 살짝 바꾸는 그 태도가 상당히 맘에 안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빠가 현관까지 따라나가며 다녀오라고 하는데 대꾸도 안 하고 나가는 건 뭔가... 우뛰... 이런..

위아래가 전도된 이 느낌...


귀가 시간이 늦다.

9시 반에 LINE으로 내가 먼저 연락하니 슬슬 식당을 나오려고 한다는 여유로운 이 여고생.

10시 반에 현관에서 기척이 들린다. 단단히 벼르고 거실에 앉아 있는데...

어라? 이 녀석 안 들어오네?

복도로 나가보니 욕실에서 기척이 들린다.

おいおい!([oioi] 야야) ちょっと待った!!!([chotto matta] 기다려!)

귀가를 했으면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가 먼저이고, 혼날 짓을 했으면 혼나고 반성하는(척!)이라도 하는 게 먼저이고 도리이거늘 뭘 잘했다고 오자마자 문 잠그고 욕실행?

성적이고 공부고 다 필요 없다.

사춘기고 오춘기고 다 필요 없다.

나에게는 절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철칙이 몇 개 있는데 지금 딸아이가 그걸 어긴 순간이다.

좀처럼 이런 일은 없어서 나도 감정 조절의 앞뒤가 바뀌어 버린 전도 상태...

이성이 앞섰다면 아이를 조용히 앉히고 언성을 높이지 말고 자분자분 오늘의 오픈 캠퍼스 일부터 하나하나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 게 맞다는 걸 안다.

하지만, 여러 일들이 전도되다 보니 내 이성도 감성도 모두 엉망진창으로 뒤엉켜버렸다.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순서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딸은 날 너무 잘 알아서 저렇게 엄마가 떠들어도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다독여 줄 것이라고 이미 내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가 또 내 감정을 흔든다.

오늘은 모든 게 전도된 상태.

하지만 지금 내 행동만은 앞뒤 없이 전진! 전진!이다.

요즘 겨우 마음 잡고 공부를 시작한 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거기에 비위를 맞춰가며 잘못한 일을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무엇을 위한 공부인가!

겨우겨우 딸아이의 반성하는 척! 을 뒤로 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2시...내일이 눈앞에 있다.


아빠와 아들은 나와 딸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둘이서 거실에서 꽁냥꽁냥 재미나게 지켜보다가 어느새 각자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다.

조용해진 집 안에서 가라앉지 않는 흥분을 데리고 스탠드가 곱게 켜진 구석진 내 바카라상에 앉아본다.

작은 창문을 여니 초여름의 상큼한 밤공기가 후욱 들어와 내 흥분을 토닥여준다.

큰 숨을 내쉬어 본다.

어쩌면...

아이에 대한 나의 애정과 바카라임도 역시 전도되어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