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냉장고를 청소할 시간

저축하듯 쌓아둔 감정, 얼어 붙기 전에

by혜준

난 일주일 중 이틀을 새벽 4시 반에 일어난다.

내 출근 준비와 함께 딸 도시락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맛없는 도시락을 정성껏(?) 싸고 아이들 아침밥을 간단히 준비한 후에

허겁지겁 짧은 눈썹을 날리며 집에서 나서는 게 6시 45분...


내 취침 시간은 자주 12시를 넘기므로, 수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밀의 병기가 있다.

내 부족한 잠을 채워 주는 금쪽같은 시간...

6시 55분의 전철을 타면 앉을 수가 있으므로 난 자리에 앉자마자 취침 모드로 들어간다.

갈아타는 종착역까지 45분간은 꿀잠을 잘 수 있다.


그날도 가방을 누가 훔쳐갈세라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고 자고 있는데 뭔가 "휙"하는 느낌이 든다.

무거운 눈꺼풀을 열고 옆을 쳐다보니, 꿀잠을 자던 내 몸이 기울어져

옆에 앉은 여자분의 몸에 내 팔이 조금 닿은 모양이다.

기겁을 한다고 해야 하나 매몰차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내 팔로부터 자기 몸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이

민첩하고 차갑기 그지없다.

기분이 묘했다.

내 팔에 무슨 응가라도 묻었나?

내 팔이 마징가제트 무쇠팔처럼 무거웠나?

내가 뭐 자기가 좋아서 들러붙기라도 했나?

뭐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으로 피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마치 내가 무슨 더러운 존재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아직 30분이나 더 잘 수 있었는데...

꿀 같은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그것도 조금 화가 났다.


아침 전철 안에서 가끔 보는 썩 기분 좋지 않은 광경이 있다.

내가 당하지 않더라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싸해지는 광경이다.

날카로운 신경전과 같은 미묘한 공기.

차가운 거부의 몸짓.

일본에서 서로 큰 소리로 싸우는 걸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하지만, 서로 찌릿찌릿한 정전기 같은 짜증과 차가운 분노로

상대방을 경멸하는 듯한, 혐오하는 듯한 몸짓과 눈빛은 자주 본다.

지금이야 앉으면 틈새 시간 공략해서 쪽잠 자는 것이 생활화된 나이지만

예전엔 전철에 앉으면 사람들 관찰(고도의 기술이 필요함, 응시는 금물)과

창 밖 경치를 바라보며 멍 때리기가 내 주된 작업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탁"하고 우산을 신경질적으로 치거나

앉거나 섰을 때 옆 사람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무음(無音)으로 거칠게 피하거나 치거나

서 있는 사람의 발이 앉아 있는 자기 발 끝에 닿기라도 하면 빠르게 휙 피하거나 째려보거나

자기의 물리적 심리적 바운더리를 조금이라도 넘으면

너무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을 테니 일본 문화 전체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상대방을 참 씁쓸하게 한다.

조금 더 여유가 있고 따뜻했으면...

그 가시 같은 따가움과 얼음 같은 차가움 대신에

조금 부드럽고 조금 상냥하게 조금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을 대할 수는 없을까.


어제 있었던 모임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부부싸움을 하면 오래가냐고 물었다.

"우리는 싸울 땐 툭 터놓고 격렬하게 싸우지만 뒤끝이 없다"는 말을 하자,

거기에 있던 세 명의 일본 남성들이 동시에 입을 모아

"우와..."하고 감탄을 한다.

뭐지?

"いいっすね~"([iissune] 거 좋네요)

お世辞([oseji] 빈말, 아부, 공치사, 발림말)?

사람에 따라서는 감정을 저축하듯 차곡차곡 쌓아두며 사는 걸까?

싫은 감정을 마음 속에 보관해 두며 사는 게 과연 편할까?

편할 리가 없을텐데...

힘들텐데...


사람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졸지 않고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본다.

싫은 감정, 화난 감정이 풀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면

그 뜨거운 울분과 억울함이 서서히 식어

결국은 얼음같이 냉정해진 마음이

일상의 행동에서 그처럼 거칠고 차갑게 온몸으로 표현되는 게 아닐까.


밤 아홉 시를 넘긴 전철에 흔들리며

꼬박꼬박 졸고 있는

내 옆자리의 여학생의 긴 머리가

내 어깨에 살짝살짝 닿는 것을 가만히 대어 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 안을 청소하듯이

우리에겐 가끔

마음의 청소도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