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手(せんて)를 치는 마음
언니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진 보통 키에 적정 체중이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갑자기 키가 크고 살이 찌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지금의 키인 168센티미터로 컸고 체중도 많이 늘어서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꽤 커 보이는 편이었다.
다행히 얼굴이 빙산의 일각처럼 작고, 자신의 신체에 전혀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아 自信이 넘쳤다.
성격이 밝고 서글서글해서 학교 선생님들께도 친구들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난 언니랑 세 살 차이로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입학을 했는데, 선생님들은 나를 "○○이 동생"으로 기억해 주시곤 해서 언니 덕을 톡톡히 봤다.
하지만, 언젠가 내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 언니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너네 언니야?"
하고 물었을 때, 나는 그 말에 묻어 있는 조소와 경멸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우리집에 놀러 올 만큼 친한 친구가 생기면, 묻지도 않는데 미리
"우리 언닌 뚱뚱해"
를 반복해서 알렸다.
속으로는 킥킥거리면서 안 그런 척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내가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 말을 듣고 언니를 본 친구들은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뚱뚱하지 않은 언니를 보고
"너네 언니 그렇게 안 뚱뚱한데?"
라고 말해 주었다.
나의 행동이 언니를 위해서인지 나를 위해서인지는 잘 몰랐다.
그때는 그냥 그게 언니를 보호하는 일이라고, 언니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상처받는 내 자신을 먼저 보호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단코 그때나 지금이나 난 언니가 전혀 부끄럽지 않다.
내가 싫었던 건, 내가 사랑하는 언니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다.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보통" 혹은 "같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에 대한 세상의 그러한 시선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선을 부정하고 도망치기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난 나 자신에 대한 타인의 시선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사실 지금도 그렇다.
난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만 오해받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의 시선과 평가의 잣대로 오해를 받거나 상처를 입는 건 참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니, 난 언니뿐만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늘 이런 식으로 대응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누군가가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려는 게 느껴지면,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 그 시선에 맞서는 방식.
그 부정적인 시선이 한낱 편견일 뿐이며,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하는 별거 아닌 것임을 자각시키고 싶었다.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내 나름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난 애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말에는 그다지 진심이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서 한국인들의 외모지상주의나 성형, 입시제도, 학벌주의슬롯 등에 관한 부정적인 시선이 느껴질 때는 그것을 굳이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내 입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부연 설명을 한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그들이 그렇게 된 배경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라고...
그렇다고 내가 대한민국의 애국자인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에 오래 살았어도 아직 이곳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여기서 경험한 것 중에 이해가 안 가는 것들, 답답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일본에 대해 비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내 글을 통해 일본은 우리랑 달리 이런 면이 있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혹은 꼭 그렇게 답답해할 필요가 있나라는 식으로 듣는 사람이 느껴주길 원한다.
나의 필력이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와서 내가 쓰는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한일의 대립구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우리 아이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내 입으로 아이들에 대해서 투덜거리는 것은 비난이나 불만이 아니다.
솔직히, 세상의 엄친아, 엄친딸과의 비교에서 우리 아이들을 얼른 숨기기 위한, 나만의 전략이다.
따라서 자식 푸념을 하는 나에게
"야, 심하다. 뭐 진짜 그런 애들이 있냐. 너 정말 힘들겠다"라고 위로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너네 애들 그렇게 안 나쁜데?"라는 속 보이고 입발린 달콤한 위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