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한 건, 이유가 있었다
우리 집 부엌에는
언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숟가락이 하나 있다.
남편은 자기가 학교 내의 다 쓰러져가는 기숙사(그래서 방값도 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지금은 철거되어 그 자리에 도서관이랑 부대시설이 지어졌다)에 살면서, 학생식당을 자기 집 부엌처럼 생각하고 살 때 거기서 가져와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추리를 한다(당신은 장발장? 은식기라면 몰라도 스테인리스 숟가락은 왜?).
내 얼마 되지 않는 살림과 남편의 너저분한 살림(나보다 훨씬 먼저 와 있었으므로)을 합쳐 신혼살림을 시작할 당시에는, 가난한 유학생 둘이 그 달 벌어 월세 내고 사느라 제대로 갖춰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비(私費) 유학생으로 온 나는, 결혼까지 부모님께 도움을 받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밥그릇과 컵, 접시는 물론, 숟가락과 젓가락도 모두 들쭉날쭉인 상태로 살림을 시작했다.
언니 친구가 결혼 선물로 무거운 포트메리온 홍차 세트와 시계를, 비싼 배송료까지 물고 한국에서 보내 주었다.
하지만, 우리 살림에는 猫に[nekoni]小判[koban](고양이에게 금화, 즉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격이었고 이제껏 몇 번이나 꺼내 썼을까.... 아직도 부엌 수납장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엄마는 오면 우리를 늘 "일본 거지"라고 했고, 아이를 낳고 키워도 늘 유학생 살림같이 어설프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올 때마다 엄마는 내가 안 보는 틈을 타서 이것저것 사다 놓았다.
나와 남편은 둘 다 인테리어나 살림살이에는 흥미도 없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덕분에, 본의 아니게 한동안 유행했던 미니멀리즘, 단샤리(断捨離)를 실천하며 살았다.
정말 필요한 거 외에는 사지 않았으니 버릴 것도 없었지만,
이 정체불명의 숟가락은 아직도 버려지지 않고 20년 동안 내 눈앞에 버티고 있다.
남편이 들고 다녔던 세월을 생각하면 이 숟가락은 거의 30년, 아니 학생식당의 수저통에 있었던 기간까지 계산하면 어쩌면 50여 년이 넘은 숟가락일 수도 있다.
보기엔 정말 촌스러운, 길에 떨어져도 아무도 쳐다볼 것 같지도 않은 너무나 흔한 숟가락.
IKEA나 無印良品에 가면 세련되고 심플하면서 저렴한 수저 세트가 즐비하다.
값싼 유행템들은 샀다가 질리면 얼른 버리고 새로운 세트를 구입하면서도, 난 왜 이 정체불명 숟가락을 버리려고 손에 들었다가도 지그시 쳐다보다 다시 제자리에 놓게 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제는 외출하는 길에 양산을 전철에 두고 내렸다.
애착이 가던 양산이라 처음엔 속이 상했지만,
“여기까지가 너와 나의 인연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니 맘이 편했다.
일본에도 인연을 의미하는 "縁[en]"이라는 말이 있다.
학생들이 가끔 연애 상담을 해 오면, 난 비록 연애 경험은 별로 없지만 무엇보다 이 "縁"이라는 개념(?)으로 집착과 미련을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헤어지고 나서
“그때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해 줄 걸"
하는 후회가 남지 않도록, 지금 내 곁에 있을 때 진심으로 열심히 사랑하고 싸우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만남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두 사람의 "縁"인 것이다.
그걸 억지로 이으려 한다거나 억지로 끊으려 하면서 아등바등 괴롭고 힘든 것도 사실은 "縁"인 것이고,
그것이 언젠가는 결론이 날 테니 서두를 필요도 없고 질질 끌 필요도 없다.
이른바,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자는 말이다.
남녀관계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사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내가 쓰고 입고 사용하는 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담아서 다정하게 대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소중히 진심으로 대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싶다.
억지로 잘하려고 억지로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고 힘들이지 말고,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 감정을 소중히 하면서 상대방에게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 어렵지만 중요한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지금 갑자기 연락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주저하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연락을 해 본다면 어떨까.
그게 바로 새롭게 이어지는 "縁"의 시작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내 주위의 활발한 "縁"의 움직임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도 없잖아 있지만, 난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이 인연에 대해 감사하고 소중히 하고 싶다.
"縁"이 이어지고 있는 이 정체 모를 숟가락은, 왜 그런지 다른 숟가락이 옆에 많이 있어도 자꾸 손이 간다.
물론 쓰기 편한 손잡이와 길이, 적당한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 앞쪽이 뾰족해 설탕이든 고춧가루든 적당한 양을 뜨기 편하도록 되어 있긴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도 아닌 것 같다.
남편과 내가 결혼해 이렇게 우리가 한 지붕 아래에 살게 된 "縁"으로 이 숟가락과의 "縁"도 시작되었고, 앞으로 또 어떤 "縁"으로 우리가 이 숟가락과 헤어지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내 부엌에서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이 고마운 인연도 소중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