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문예지 <영남문헉> 46호|여름
풀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다. 살며시 부는 작은 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린다. 풀은 햇빛을 잔뜩 받아 희망의 연두색을 과시하며 눈부신 생명력을 내뿜는다. 참으로 평화로운 날이다.
산바카라로를 걷는데 풀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풀들이 잡아당기는 대로 나는 그대로 멈춘 채 풀들만 바라보았다. 근심 걱정 없이 우쭐우쭐 춤을 추는 풀들이 순간 부러웠다. 다음 생에는 풀로 태어나고 싶단 생각이 머리를 잠깐 스쳤다. 시간이 멈춘 듯 한참 동안 풀만 바라보고 서 있다가 걷던 길을 다시 걸었다.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지만, 한동안 풀들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풀들이 왜 부러웠을까.
미국 작가인 캐럴 A. 터킹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절대 후회하지 마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터킹턴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부터 나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배운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轉禍爲福), 화복상의(禍福相倚) 등 사자성어의 의미에 의지하며 큰 욕심도 큰 고민도 없이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 일이 잘되면 좋고, 안되면 배우면 되었다. 인생의 평지 길을 잘 걸어왔기에 약간의 오르막이나 약간의 내리막도 거뜬히 넘었다. 불필요한 근심이나 걱정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서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되고 다양하게 자잘한 걱정들이 계속 머리를 채웠다. 그렇다고 대단한 걱정들도 아니었다. 작은 눈뭉치에서 시작한 근심은 큼직한 눈덩이로 점차 커져만 갔다. 아마 풀에 꽂힌 그날도 근심으로 만든 눈덩이를 계속 굴려 가며 걷고 있었나 보다. 사실 대처 할 수 없는 근심과 걱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걱정만 한다고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기 시작하니 마음을 새롭게 다듬기가 어렵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에 매달려서일까. 어느 날 갑자기 오른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부딪혀 멍이 들었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통증 부위와 양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팔꿈치 아래가 아팠다가, 팔꿈치가 아팠다가, 팔꿈치 윗부분이 아프기도 했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 호전되어가고 있지만, 치료가 더디자 덜컥 겁이 났다. 어디서 들은 것이 생각나서, 류머티즘 관절염인가 싶은 염려에 검색도 해보았다. 안내된 류머티즘 관절염 증상과는 달라서 마음을 한시름 놨다. 마음의 부담은 덜었지만, 계속된 침치료 속에서도 완벽하게 낫지 않으니 이내 답답한 마음이 생겼다. 마음이란 참으로 가벼운가 보다.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지니 이제 답답한 마음이 커진다. 걱정이나 답답함 같은 부정적인 마음은 금방 들어섬에도 불구하고 왜 안심이나 편안함 같은 긍정적인 마음은 더디게 올까. 탁구공처럼 자꾸 튕겨 나가려는 마음을 다잡기가 참으로 어렵다. 아무튼, 아픈 팔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팔은 씻은 듯이 나았다. 얼굴에 뾰루지 하나만 올라와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던데, 하물며 통증이야. 걱정하며 보낸 시간이 아깝다. 시간은 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시간을 물처럼 쓰다니, 걱정에서 답답으로, 답답에서 한심으로 마음은 돌다리를 건너듯 계속 움직인다.
하나가 잊힐만하니 다른 근심과 걱정이 끼어들었다. 통통 뛰어오르려는 마음을 손아귀에 잡았다. 다시는 사방팔방 뛰어오르지 않도록 돌멩이를 매달았다. 어디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마음의 돌멩이를 치우면 또 다른 돌멩이가 생긴다고 했다. 어차피 계속 생길 돌멩이라면 동그랗고 자그만 차돌을 가슴속 마음에 담아 평형을 유지하는게 낫겠단 생각이다. 치우기만 하던 돌멩이를 일부러 두었더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염려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럭저럭 염려를 붙들어 매어놓고 산다. 눈 안의 들보처럼 크게 보이던 손톱 밑의 가시는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진짜 크게 걱정해야 할 일이 없음에 감사하며, 맡은 일에 시간을 충실하게 보낸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이 남을 것이다. 캐롤 A. 터킹턴의 말처럼, 이 작은 소동은 경험으로 남았다. 아니 풀을 부러워하던 봄날의 추억이기도 하다.
한 번씩 불던 봄을 시샘하는 서늘한 바람도 지나가고, 어느새 시원한 바람이 반가운 여름이 짙어 간다. 연두색 풀은 그새 더 진해져 녹색이다. 여전히 세상 태평하고 한가로워 보인다. 가을이 되면 풀은 마르고, 겨울이 되면 없어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봄, 풀은 솜털같은 머리를 삐죽삐죽 내밀 것이고 다시 푸르를 것이다. 행복과 고난이 돌고 도는 자연의 섭리를 풀에게서 배운다. 오늘 싱그러운 날씨에 나도 우쭐우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