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성채

2026.7.11

byAltusSolum

내면의 성채(Inner Citadel)


내 일기의 맨 앞장에는 몇년째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Aber alles, was vortrefflich ist, ist ebenso schwierig wie selten”

“But all things excellent are as difficult as they are rare.”

(그러나 모든 탁월한 것은 어렵고도 드물다.)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가 쓴 역작 <에티카(Ethica)>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문장이 왜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스피노자에 대해 처음 읽었을때는 철없는 대학생 시절이라, 그저 '뭘 또 인생을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까?' 싶었다. 요즘 말로 하면 굳이 제 팔짜를 제가 꼬는 사람(지팔지꼰)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초상화를 보면 선이 너무 곱고 우아한데, 눈은 무섭도록 너무 맑아서 함부로 대할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바카라의 첫문장도 아니고 세상에 마지막 문장을 저렇게 여백을 크게 열어두는 저자는 대체 얼마나 대범한 사람인가에 대해 그 큰 위압감을 느꼈었다.

그런데 이십대가 지나고, 삼십대가 겪어내고, 사십대를 살면서, 스피노자의 삶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기득권으로부터 버림받은 철저한 이방인. 그의 마지막 문장이 그렇게 큰 여백을 가진 이유를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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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오해하듯 스피노자는 ‘가난하고 핍박받은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가장 성공한 거상의 장남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부와 명예가 보장된, 그야말로 완벽한 기득권의 방패를 쥔 조건이었다. 가업을 물려받아 거상으로 살거나, 모두의 존경을 받는 랍비(유대교 율법학자)가 될 수 있는 완벽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 만약 그가 속마음을 적당히 숨기고, 권력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며 순응했다면, 그는 평생 최고급 마차를 타고 안락한 늪에서 배불리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조리한 교리에 "네, 맞습니다"라고 동의하는 것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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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당시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은 스페인 등지에서 종교 탄압을 피해 도망쳐 온 난민들이었고, 주류 기득권인 기독교 슬롯의 눈 밖에 나면 언제 다시 쫓겨날지 모른다는 지독한 공포에 시달렸다. 생존을 위해 공동체 내부를 억압하던 그 맹목적인 교리 앞에서, 스피노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근간을 모두 뒤흔드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신은 저 하늘에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이 우주와 자연 그 자체다!"

공동체는 패닉에 빠졌다. 체제의 안정을 뒤흔드는 이 유능하고 통찰력 있는 청년은 그들에게 '실존적 위협'이었다. 결국 유대인 슬롯는 생존을 위해, 투명한 진리를 말하는 스피노자를 향해 역사상 가장 잔혹한 파문(영구 추방)을 내렸다. 그것은 종교적 심판이라기보다, 조직의 안위를 위해 바른말을 하는 개인을 처참하게 짓밟아버린 권력의 비겁한 꼬리 자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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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서 쫓겨나 가난 속에 렌즈를 깎으며 연명하던 스피노자에게, 1673년 당대 최고의 독일의 명문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철학과 정교수직을 제안했다. 평생의 안정과 거대한 기득권의 방패가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단 하나의 조건은 “공인된 종교와 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선에서 철학을 할 것”이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먼지 나는 골방으로 돌아가 평생 안경과 현미경 렌즈를 깎았다. 그는 그저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빛의 파동설을 주장했던 당대 최고의 과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가 스피노자가 깎은 렌즈의 정밀함에 감탄해 교류를 제안할 만큼 훌륭한 실력자였다. 철학에서 기하학적이고 엄밀한 논리를 추구했던 그의 성향이 렌즈를 깎는 정밀한 작업에서도 그대로 발현된 것이다.

작업중 렌즈에서 나온 유리 가루가 폐를 망가뜨려 폐결핵으로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묵묵히 그 일을 지속했다. 세상을 더 투명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물리적인 렌즈를 깎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그는, 밤이 되면 인간이 세상의 부조리와 편견을 걷어내고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이성이라는 '철학적 렌즈'를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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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1675년에 <에티카>를 완성했지만 그가 무신론자라는 소문이 퍼지며 신학자들과 권력자들이 그를 잡아 죽이려 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목숨과 사유를 지키기 위해 출판을 포기했다. 서랍속에 잠자고 있던 <에티카>는 1677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친구들에 의해 출판되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적당히 멍청한 척, 순응하는 척하며 대학의 권위 안으로 들어간 뒤 힘을 기르면 되지 않았을까? 스피노자가 기꺼이 렌즈를 깎으며 유리 가루를 마셨던 이유는 단 하나, '온전한 나로 살고싶어서..'가 아니었을까?



피에르 아도 <내면의 성채,2001>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의 사유를 빌려 인간을 ‘둘-이면서-하나인 존재(Two-in-one)’로 정의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조차 끊임없이 내면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오만한 권력이나 부조리한 시스템 앞에서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눈 딱 감고 그 한순간만 타협하면 인생이 참 편해진다. 하지만 사유하는 자들은 그 ‘쉬운 길’을 선택하지 못한다. 요령이 없어서가 아니다. 권력자에게 굽히고 집으로 돌아간 밤, ‘비겁하게 타협한 나 자신’과 한 방에서 단둘이 마주 앉아야 하는 끔찍한 형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우리 '내면의 성채(Inner Citadel)'다. '내면의 성채'는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아도(Pierre Hadot, 1922-2010)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분석하며 정립한 개념이다. 세상의 어떤 권력, 폭력, 가난, 모욕도 내 동의 없이는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가장 깊고 단단한 통제소(헤게모니콘, Hegemonikon)를 뜻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나 자신과의 대화(Two-in-One)'는 바로 이 절대적인 내면의 성채 안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회의인 것이다.


스피노자가 교수직을 걷어찬 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윗사람의 헛소리에 동조하지 못하고 기꺼이 조직 밖으로 튕겨 나오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다. 순응하지 못한 대가는 가혹하다. 소속감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이, 때로는 남들처럼 바보인 척 타협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며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과거의 세계는 이미 부서졌는데 새로운 세계는 아직 열리지 않은 진공 상태. 그 경계인의 자리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은 결코 우아하거나 영웅적이지 않다. 매 순간 불안에 흔들리며, "왜 나는 평범하게 속하지 못하는가"를 묻는 처절한 미완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과의 불화는 이 악물고 버티면 된다. 하지만 나의 지적 정직성을 내 손으로 훼손하는 ‘나 자신과의 불화’는 영혼을 파산시킨다. 타협하지 못한 자들은 영웅이라서가 아니라, 그 내적 불화가 너무나 두려워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 연약하고 투명한 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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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조차도 위대한 철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현실의 렌즈를 깎는 유능한 렌즈세공업자였다. 세상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단은, 그저 무바카라임하게 세상 밖으로 도피해 고고한 척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키고 싶은 내면의 성채, 내면의 토양(Altus Solum)가 있다면, 그것을 온전히 지탱해 줄 현실의 렌즈 또한 묵묵히 깎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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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어 기꺼이 궤도 밖으로 튕겨 나온 이들이 있다면, 스피노자의 마지막 문장은 묘한 위로가 된다. 우리가 겪는 이 지독한 마찰음과 고립은 우리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결함 투성이라서가 아니다. 껍데기를 버리고 나 자신의 고유한 이성과 사유를 지켜내는 일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토록 험난하고 지난한 길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렌즈를 깎는 그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직조해 냈다. 우리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불안한 들판 위에 서 있지만, 긍지 하나로 매일의 불확실성을 통과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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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탁월한 것은, 그 지독한 불화와 번뇌의 한가운데서 비로소 아주 느리게 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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