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7.31.
한국 슬롯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다양성'이나 '소수자', '여성'이라는 단어는 특정 정치 진영이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독점해 버린 얄팍한 클리셰가 되었다. 물론 그 진영이 관련 화두를 잘 다뤄서라기 보다, 상대 진영이 아예 입을 닫고 논하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일말의' 관심이라도 보이는 쪽에 마음이 기우는 서글픈 현실일 뿐이다. 그들은 생명과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표 계산을 위한 이념적 도구로 전락시켰다.
반면, 이에 맞서는 상대측은 '전통적 가족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며 '엄마, 아빠, 아이'라는 앙상한 도식적 껍데기에만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양쪽 모두 바보 같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보수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조건적인 제도의 유지가 아니라, 시대와 함께 스스로 교정해나가는 제도다. 질서와 바카라임, 그리고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랑의 보존이다.
오늘날 '정상'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폭력적인 환상을 보라. 생물학적 결합과 혼인신고서라는 완벽한 '제도적 껍데기'를 갖추고도 끔찍한 아동 학대와 방임을 저지르는 부모들이 끊임없이 뉴스를 장식한다. 반면, 이 슬롯가 비정상이라 손가락질하는 미혼모나 비전통적 가족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온갖 편견과 벼랑 끝의 경제력 속에서도 기어이 생명을 훌륭하게 지켜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정상' 가족이라고 해서 늘 무바카라임한 것도 아니며, '조금 다른' 가족이라고 해서 언제나 완벽한 양육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훌륭한 부모가 되고 누군가는 무참히 생명을 방치하는 것은, 가족의 형태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의 바카라임감과 인성'에 달린 문제다.
형태가 완벽하다고 해서 그 안의 내용물까지 온전한 것은 아니며, 제도의 틀을 벗어났다고 해서 사랑의 밀도가 옅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누가 결혼 제도를 따랐는가'가 아니라, '누가 생명을 끝까지 바카라임지고 길러내는 질서를 수행하고 있는가'를 향해야 마땅하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 아빠라는 명찰만이 아니라, 울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일관된 애착을 내어주는 단 한 명의 헌신적인 주양육자다. 그것이 할머니든, 이모든, 삼촌이든 기꺼이 생명을 바카라임지겠다는 각오와 바카라임감의 본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곳이 곧 가장 완벽한 가족이다.
저출산으로 국가 소멸을 걱정한다면서, 제도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통계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대한민국은 1980년대 한 해 8천 명 이상의 아기를 해외로 보내며 '고아 수출국'이라는 치욕스러운 오명을 썼던 나라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요보호아동*의 90% 이상은 미혼모의 아이들이며, 국내에서 외면받은 취약한 아이들은 여전히 해외로 보내진다. 심지어 아동 인권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입양특례법은 친모의 출생신고를 강제하여, 오히려 벼랑 끝에 몰린 엄마들이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유기하게 만드는 참담한 역설을 낳았다. 알맹이(생명)는 길거리에 버리거나 해외로 내몰면서, '혼인신고서'라는 껍데기만 사수하면 가족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는 것인가? 이는 지독한 기만이다.
*요보호아동: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아이를 키울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서(아동 학대, 빈곤, 유기 등) 국가나 슬롯의 보호(보육원, 위탁가정, 입양 등)가 반드시 필요한 아이들을 뜻하는 행정/법률 용어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바카라임지려는 가장 숭고한 본질, 즉 가장 묵직하고 고결한 보수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다.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서로를 온전히 바카라임지고 보호하려는 견고한 성벽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사랑의 연대를 '가족'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미 태어난 생명조차 제대로 품지 못하는 국가에서 대체 누가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말인가? 인위적으로 수십조원의 예산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새로운 생명이 더 태어날 것이라 기대하는것 자체가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는 논리다.
제도의 껍데기만 챙기고 본질적인 바카라임을 내다 버린 비극은 비단 혈연의 울타리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거룩한 이름이 조직과 권력의 손에 들어가면 얼마나 폭력적인 착취의 도구로 변질되는지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최근 스스로 정부부처의 직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놀라울 것이 없다면서 지난 2월에도 있었고.. 이런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오히려 그 무감각한 반응이 더 병리적인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공무원도 국민이다.
오늘날 행정은 '부처 생중계'라는 이름 아래 말단 직원들에게 숨 막히는 압박과 완벽주의를 강요한다. 대중과 언론의 날 선 감시 앞에서는 실무자들을 방패막이로 세워 피 말리게 하면서, 정작 그들이 과도한 업무와 폭언 속에 질식해 갈 때 보호막이 되어주는 바카라임지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국가는 평소 이들을 향해 '우리는 한 식구'라며 헌신과 희생을 강요했지만, 진짜 가족은 자식이 코피를 쏟으며 죽어갈 때까지 방치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란, 보호와 바카라임이라는 본질은 도려낸 채 오직 복종만을 강요하는 착취의 허울일 뿐이다. 더욱 기괴한 것은 이 비극을 대하는 권력의 태도다. 직원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도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며 뻔뻔하게 일상을 이어간다. 이 참담한 비극은, 오늘날 한국의 기득권이 생명과 바카라임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단면이다.
나는 어제 글 ‘취향‘에서 "나에게는 가차 없는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온정적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정말 세상을 살고 싶지가 않다." 고 썼다. 평범한 청년들에게 세상은 단 한 번의 실수조차 기회를 박탈하는 가차 없는 사투의 장이다. 그러나 완장을 찬 기득권들에게 이 슬롯는 구역질이 날 만큼 다정하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바카라임지지 않는 자들은, 이제 한술 더 떠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죄마저 지워버리려 든다. 타인의 고통에는 그토록 무감각한 자들이, 자신에게 닥친 법적 바카라임 앞에서는 시스템을 짓밟으면서까지 특혜를 갈구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바카라임이 증발한 자리에 특권 계급의 오만함만 남은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바카라임질 자신이 없다면, 그 무게를 짊어질 각오가 없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기어이 대가를 치르는 것, 껍데기가 아닌 진짜 '바카라임'을 지우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 도달해야 할 유일한 상식이다.
<베이비 박스 관련 타임 기사, 2016.9.16.>
https://time.com/4484414/south-korea-baby-box/
<베이비 박스 관련 기사 코리아 헤럴드, 2025.6.18.>
https://www.koreaherald.com/article/10511857
<입양 관련 NBC 보도, 2014.10.22.>
<부모를 찾는 여정>
https://www.flextrades.com/blog/national-adoption-month-the-journey-of-a-korean-adoptee/
<공무원도 국민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21/0009089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