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이 야만으로 퇴보하고, 국가가 몰락하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내일 심어야 할 '씨앗'을 당장의 권력을 위해 파먹을 때 거대한 파국은 시작된다.
어제 우리는 세계의 흐름을 놓친 한국 정치의 '시간의 지체(Time Lag)'를 경고했다.
오늘은 세대를 관통하는 구조적 절망인 '높은 시간 선호(High Time Preference)'의 매트릭스를 해부하고,
이 척박한 토양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존적 변혁 전략을 제시한다. ▶
ALTUS SOLUM 2026.9.12.(토)
어제 우리는 <25년전 오늘>에서 제국들이 생존을 위해 야만적인 카지노의 하우스로 진화하는 동안, 낡은 과거의 늪에 빠져 밥그릇 싸움이나 벌이고 있는 한국 정치의 끔찍한 '시간의 지체(Time Lag)'현상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시간의 지체는 대체 왜 발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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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서 <사랑=시간>에서 게리 베커(Gary Becker)의 렌즈를 빌려, 인간의 가장 희소한 자원인 '시간을 누구에게 쓰느냐'가 그 사람의 진심을 증명하는 '드러난 선호(Revealed Preference)'임을 통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논리를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생존이라는 더 거대한 체스판으로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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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진심이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로 증명된다면, 문명의 융성과 개인의 생존은 시간을 '어느 시점(현재 vs 미래)'에 두느냐로 결정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진화심리학과 경제학적 잣대가 바로 '시간 선호(Time Preference)'다.
'높은 시간 선호(High Time Preference)'라는 것은 당장의 쾌락과 이익을 위해 미래를 가차 없이 희생하는 태도를 말한다. 즉, 당장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내년 봄에 뿌릴 씨앗마저 오늘 가차 없이 씹어 삼키는 태도를 말한다. 물론 우리의 생존본능 시스템 자체는 내일이 없는 짐승들과 사투를 벌이던 수렵채집 시대의 원시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토록 거대한 문명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은, 본능을 거스르고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며 현재의 욕망을 기꺼이 지연시킨 '낮은 시간선호(Low Time Preference)'의 인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를 온전히 희생하며 고통만 받으라는 금욕주의가 아니다. 오늘 하루를 버텨내며 먹고살되, "농부는 굶어 죽어도 내년 봄에 뿌릴 종자(씨앗)는 베고 죽는다"는 처절한 생존의 마지노선을 지키는 태도다. 결국 인류가 위대한 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척박한 겨울을 나더라도 기어이 내일의 희망을 위해 단 하나의 '씨앗'은 남겨두었던 끈기와 인내심 덕분이었다.
그러나 절망스럽게도 지금 우리 슬롯를 병들게 하는 가장 치명적인 원인은,
바로 미래의 씨앗마저 남김없이 게걸스럽게 파먹는 권력자들의 '높은 시간 선호'라는 질병이다.
기득권 엘리트들이 미래의 씨앗을 파먹으며 만들어낸 이 거대한 '시대적 지체'의 청구서는 비단 2030 청년들에게만 날아온 것이 아니다. 우리 슬롯의 허리인 4050 중년들 역시 이 지독한 구조적 절망의 늪에서 숨통을 조이고 있다.
청년들이 한때 '욜로(YOLO)'를 외치며 비싼 커피와 화장품에 푼돈을 탕진하거나, 당장 몇십만 원을 쥐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존엄마저 헐값에 넘기는 비참한 선택을 하는 것은 결코 그들이 나태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숨만 쉬고 일해도 집을 살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의 무기력이었다.
그런데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하며 '낮은 시간 선호(인내와 저축)'를 실천해 온 4050 세대의 현실은 어떠한가. 위로는 부모를 부양하고 아래로는 자식을 건사하며 묵묵히 씨앗을 심어왔지만, 비정상적인 집값과 사교육비,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고용 불안 속에서 그들이 평생 쥐고 있던 씨앗은 이미 말라비틀어졌다. 청년들이 미래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해 체념한다면, 중년들은 평생을 바친 과거와 현재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붕괴를 겪고 있는 것이다. 결국 20대부터 50대까지,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 모두가 내일을 꿈꿀 동력을 상실한 채 오늘 하루의 생존에 급급한 '높은 시간 선호'의 늪으로 추락해 버렸다.
세대를 불문하고 국민들이 이처럼 벼랑 끝에서 허우적댈수록, 진정으로 안도하는 자들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절망적인 슬롯구조를 고착화시킨 '진짜 기득권'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다리를 걷어차 놓고도, 청년의 가난은 '노력 부족'으로, 중년의 위기는 '능력 부족'으로 치환하며 교묘하게 가스라이팅한다. 구조의 붕괴를 철저히 개인의 바카라임으로 떠넘긴 것이다. 시민들이 이 썩어빠진 시스템에 분노하는 대신 스스로를 자바카라하며 푼돈의 탕진이나 당장의 생존에 매몰되어 체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기형적인 구조를 안착시킨 자들이 어떠한 시대적 저항도 받지 않고 낡은 권력을 유지하게 만드는 완벽한 '노예적 순응의 매트릭스'다.
물론 최근에는 이 욜로의 허상을 깨닫고 극단적 절약과 건강 관리에 집착하는 이른바 '갓생' 트렌드가 부상하고 있다. 기득권이 짜놓은 소비의 쳇바퀴를 거부하고, 스스로 쾌락을 통제하며 '낮은 시간 선호'로 돌아서려는 실존적 발버둥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계가 존재한다. 기꺼이 현재의 욕망을 지연시키며 '씨앗(저축과 스펙)'을 모으는 이 갓생의 삶조차, 최소한의 온라인 게임이 있거나 부모가 생활의 기본 틀을 만들어줄 수 있는 청년들에게 허락된 '제한된 선택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없어 내일의 씨앗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벼랑 끝의 청년들은 여전히 푼돈의 탕진이나 자포자기의 늪(높은 시간 선호)에 갇혀 있다. 청년 세대 안에서조차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자와, 오늘을 소진해야만 견딜 수 있는 자로 찢겨버린 것. 이것이 바로 씨앗을 독점한 자들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만들어낸 가장 잔혹한 풍경이다.
이것은 현재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가장 비극적인 역설이다. 국가 이성을 짊어져야 할 여의도의 정치꾼들은 당장의 권력과 밥그릇을 위해 장관이랑 비례의원을 둘다 해먹겠다며 60년 전 떡고물을 끌어다 쓴다. 당장의 권력과 밥그릇을 위해 내일이 없는 짐승의 '높은 시간 선호'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국회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 시스템의 자정 작용이 붕괴했다는 뜻인데, 그 '하나'의 반칙을 두 번이나 용인하더니 이제는 의원과 장관이라는 '둘'이 되려고 한다. 이것을 방치하면 그 뻔뻔한 야만은 기어이 셋이 되고 넷이 될 것이며, 그 넷은 또다시 세 번, 네 번의 특권을 탐할 것이다.
반면 토양이 척박하게 찢겨나간 벼랑 끝에서도, 청년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쾌락을 통제하며 내일의 씨앗을 심으려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과연 이 시대의 진짜 야만은 누구인걸까? 이러니 결국 청년들의 입에서 "어차피 과정은 상관없고, 썩은 동아줄이라도 줄만 잘 서면 그만"이라는 지독한 냉소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피눈물 흘리며 씨앗을 심으려는 세대에게 기어이 반칙과 체념을 학습시킨 자들,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짜 야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생존법은 단 하나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며 시대를 역행(Time Lag)한다고 해서, 내 삶의 시간표마저 저들의 천박한 소비 리듬과 체념에 동기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당장 커피를 마시지 말고 고통 속에서 저축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기꺼이 푼돈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도 결코 내일을 도모할 나만의 '종자(△실력, △최소 자본, △이성)'마저 기득권의 매트릭스에 헌납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가 내 미래를 갉아먹고 사다리를 걷어찼다면, 나 스스로 내면의 성채(Inner Citadel)를 굳건히 세워 내 손에 남은 마지막 씨앗을 지켜내는 온실이 되어줘야 한다.
씨앗까지 파먹은 자들은 한철의 배부름으로 비대해지지만, 기어이 씨앗을 품고 겨울을 버텨낸 자들은 끝내 다음 계절의 주인이 된다. 척박한 토양의 불평등에 굴복하지 않고, 매일의 일상에서 '내년의 씨앗'만큼은 악착같이 남겨두는 자들. 이 시대를 돌파할 진정한 변혁의 힘은 결국 지연된 보상을 견뎌내는, 그 처절한 생존의 감각을 유지하는 깨어있는 개인들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