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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나는 골프를 치지 않는다. 어릴 적 산바카라 겸 친구들을 따라나선 적은 있지만, 그 매력을 내 안에 체화시킬 여유가 없었다. 특히 한국 특유의 골프 문화—직접 걷기보다 카트를 타고, 타인의 밀착된 서비스를 받으며, 앞뒤 팀과 쫓기듯 바짝 붙어 경기하는 환경—는 묘한 침해와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이 모든 것은 아마 내가 골프를 잘 몰라서일 것이다. 그러나 룰에 승복하고 철저히 자신과 싸우는 골프의 '스포츠 정신'만큼은 깊이 존중한다.
프로 골프 세계는 오랫동안 '능력주의(Meritocracy)'의 가장 완벽하고 순수한 표본으로 여겨져 왔다. 거대한 스폰서의 보호막이나 고정 급여 없이, 오직 자신이 필드 위에서 쳐낸 타수(Score)만큼만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야생이기 때문이다. 이 순수한 능력주의의 정점에는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 1940-)라는 살아있는 전설이 있다. 메이저 대회 18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가진 그는, 어떤 배경이나 자본의 개입 없이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정점에 오른 '아메리칸드림과 기회의 평등'을 상징하는 건국 성왕과도 같은 존재다. 그러나 최근 그가 자신이 평생을 바친 무대인 PGA 투어를 향해 "전통적인 골프의 본질을 훼손하며, 새로운 선수들이 실력으로 증명할 기회를 뺏는 끔찍한 짓"이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이 분노의 이면에는 우리 슬롯를 지배하는 능력주의가 어떻게 기득권의 도구로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찹찹한 진실이 숨어 있다.
견고해 보이던 골프계의 능력주의는 거대한 자본 앞에 민낯을 드러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의 무한한 오일머니를 등에 업은 신흥 리그 'LIV 골프'의 등장이 그 신호탄이었다. 로마 숫자로 54를 뜻하는 LIV 골프는, 기존 골프의 72홀 경쟁과 혹독한 '탈락(Cut-off)' 제도를 없애고 단 54홀만 경기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가장 치명적인 변화는 성적에 따른 생존 경쟁이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지우고, 출전 자체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거액을 보장하는 '자본과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LIV 골프가 엄청난 계약금으로 스타 선수들을 빼가며 생존을 위협하자, 위기에 처한 PGA 투어는 미식축구(NFL) 최고위 임원 출신을 새 CEO로 전격 영입했다. 골프 단체의 수장에 미식축구 비즈니스 전문가가 앉은 이유는 명확하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스포츠의 낭만만으로는 노골적인 자본의 공세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PGA 투어는 NFL 특유의 '폐쇄적 수익 모델'을 이식하여, 상위 50명의 엘리트 스타 선수들에게만 막대한 상금과 출전권을 몰아주는 '그들만의 닫힌 리그(시그니처 대회)'로 제도를 개편해 버렸다.
순수 능력주의의 화신인 잭 니클라우스가 분노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누구나 밑바닥부터 뚫고 올라갈 수 있었던 순수한 기회의 장이, 결국 외부의 위협을 명분 삼아 승자들의 기득권만을 방어하는 '구조화된 엘리트주의'로 변질되었다. 이는 현대 슬롯의 능력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슬롯적 축소판이다.
영국의 슬롯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78-2002)이 소설<The Rise of the Meritocracy(1958)>에서 처음 고안한 'Meritocracy'라는 개념은 본래 부정적인 디스토피아를 경고하기 위한 단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대 슬롯는 이를 가장 이상적인 정의(Justice)의 원칙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의 신분, 핏줄, 세습적 부가 아니라 오직 개인의 '노력'과 '재능'에 의해 슬롯적 지위와 부가 결정된다는 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엄청난 해방감을 주었다.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극대화했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자유주의적 낙관론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을 비롯해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같은 현대의 정치인과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능력주의는 '공정함'이라는 가면을 쓴 채 훨씬 더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측면이 있다.
ㅇ승자의 오만: 능력주의 슬롯에서 성공한 엘리트들은 자신의 성취가 오로지 자신의 뼈를 깎는 노력과 탁월한 재능 덕분이라고 믿는다. 부모의 재력, 유전자, 우연한 행운, 슬롯적 인프라 등 자신이 누린 '구조적 혜택'은 철저히 지워버린다. 이 오만함은 결국 성공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 상실과 혐오로 이어진다.
ㅇ 패자의 굴욕: 과거 신분제 슬롯의 농노들은 가난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자바카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스템이 '공정하다'고 선언된 능력주의 슬롯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난과 실패를 '내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을 게을리한 탓'으로 내면화하게 된다. 구조적 불평등이 개인의 실존적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슬롯의 기득권—특히 도덕적 우월감을 독점하고 공정을 외쳐온 이른바 '진보' 엘리트 권력—은 선발 주자가 후발 주자의 길을 막는 소위 '사다리 걷어차기'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후속 세대가 올라올 사다리 자체를 아예 불태워버렸다.
과거의 기득권이 자본과 권력을 노골적으로 세습했다면, 이 새로운 '도덕적' 기득권층은 '정치적 수사(rhetorc)'와 '제도의 틈새'를 교묘히 활용한다. 겉으로는 특권 교육 폐지를 외치면서 뒤로는 온갖 편법을 동원해 자녀를 의대에 보내고,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면서도 정작 대기업 기득권 노조의 고용 세습을 묵인한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들의 표리부동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학계와 지식인 슬롯마저 이 카르텔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쥘리앵 방다(Julien Benda)가 경고했던 전형적인 '지식인의 반역(La Trahison des Clercs)'이다. 보편적 진리와 윤리를 수호해야 할 학자들이 특정 진영의 '어용 지식인'으로 전락해 이들의 세대 약탈을 '숙의 민주주의'나 '슬롯적 대타협'이라는 고상한 언어로 포장하고 정당화해 준다. 지식인이 권력의 치어리더로 전락할 때, 그 슬롯의 자정 능력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 진실은 빚을 내어 현재의 잔치를 벌이고 미래 세대의 자원과 기회를 탕진하는 명백한 '세대 간 약탈'이기 때문이다.
일부 '지식인'들마저 동조하여 사다리가 불타버린 폐허 위에서, 룰을 지키며 묵묵히 버텨온 개인들과 미래를 빼앗긴 2030 청년 세대는 깊은 무기력함과 실존적 피폐함에 빠졌다. 가장 참혹스러운 기만은 이 기득권 카르텔이 청년 세대의 정당한 분노와 절망을 '보수화' 혹은 '극우화'라는 프레임으로 매도하고 병리학적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청년들의 거부는 결코 낡은 이념적 우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는 평등과 정의를 독점하면서 뒤로는 미래 세대의 몫을 당겨 쓰면서도,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권력자들의 표리부동에 대한 실존적 구역질이다.
이들은 자신의 위선이 폭로되었을 때 수치심을 느끼는 대신, 스스로를 사법권력에 억울하게 '핍박받는 순교자'로 포장하며 지지자들의 종교적 팬덤 뒤로 숨어버린다. 정치가 이성과 염치를 잃고 광기 어린 진영 논리로 전락할 때, 원칙을 지키려는 평범한 시민들은 '내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밀려나는 것인가'라는 지독한 자기 의심과 고립감에 시달리게 된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생전 육성 강의를 통해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100년 일찍 먼저 왔다.(Marx kam hundert Jahre zu früh)"고 평가한 바 있다. 이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단순히 19세기 노동자들의 물리적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인간 소외'에 대한 거대한 철학적 경고였음을 꿰뚫어 본 통찰이다.
이 경고는 오히려 고도화된 21세기 능력주의 슬롯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오늘날의 인간은 시장이 요구하는 '효용 가치(Merit)'로만 평가받는다. 나의 존재 가치가 곧 나의 연봉, 나의 학벌, 나의 직업적 타이틀로 완벽하게 동일시된다. 쓸모를 입증하지 못하는 인간은 시스템 밖으로 폐기되며, 살아남은 엘리트들조차 언제 자신의 시장 가치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 속에서 소모한다. 골프 투어가 돈이 되지 않는 무명 선수들의 사다리를 끊어버렸듯, 대한민국의 기득권 카르텔은 자신들의 지대를 지키기 위해 미래 세대의 희망을 불태웠다.
시스템에서 탈락한 청년들은 자신의 실패를 온전히 능력 부족 탓으로 내면화하며 굴욕감을 씹어 삼켜야 한다. 더욱 비참한 것은, 묵묵히 원칙을 지키며 고뇌하는 이들이 도리어 진영 논리에 얄팍하게 줄을 선 무능력한 자들에게 "현실적이지 못하다", "철이 없다"며 훈계를 듣게 된다는 사실이다. 속으로는 명백히 옳지 않다고 생각해도, 앞에서는 비위 좋게 눈감고 넘어가라는 그 비겁한 처세술이 어느새 '어른스러움'으로 둔갑하여 양심을 조롱한다. 구조적 불평등과 약탈이 개인의 수치심으로 전가되는 이 끔찍한 구조야말로 프롬이 경고한 현대적 의미의 완벽한 '인간 소외'다.
골프 투어가 상위 50명의 엘리트만을 위한 닫힌 리그로 변질될 때 스포츠의 진정한 낭만이 사라지듯, 위선과 약탈이 공정과 연대라는 참칭되어 정당화되는 슬롯에는 진정한 연대와 공동체 의식이 자라날 토양이 남지 않는다. 우리는 사다리를 불태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권력자들과, 그들의 궤변을 정당화해 주는 타락한 지식인들의 기만적인 언어에 결코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느끼는 피폐함과 고립감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이 슬롯의 양심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가장 고통스러운 증명이다. 이 비정상적인 위선의 카르텔을 해체하는 첫걸음은, 룰을 파괴하고 염치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정확한 언어로 '수치심'을 되돌려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능력주의는 결코 공정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능력이 뛰어난 자가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하다'는 신화를 넘어, 인간의 가치가 시장에서의 '쓸모'로만 재단될 수 없다는 근원적인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 개인의 성공 뒤에 숨겨진 슬롯적 운(Luck)을 겸허히 인정하고, 시스템에서 탈락한 이들의 굴욕감을 보듬는 새로운 서사가 필요하다. 그것이 능력주의가 만들어낸 차가운 인간 소외의 사막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이다.
<프롬 교수님께서 맑스에 대해 하신 말씀>
https://youtu.be/sdhs8XkTOq0?si=VyFjagB9Q9Pwq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