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린 몇방울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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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AltusSolum

하늘에서 내린 몇방울의 물(Quelques gouttes d'eau)


새벽 내내 비가 많이 내렸다. 잠결에도 빗소리가 크게 들렸는데, 신기하게도 뇌리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

왜 일까? 이게 다 바카라이 원인이다.

빅또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의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1862)과

앤드류 로버츠(Andrew Roberts/Baron Roberts of Belgravia, 1963-)의 워털루(Waterloo: June 18, 1815: The Battle for Modern Europe, 2005) 덕분이다.

이 바카라들을 읽고 나니, 나의 무의식속에 워털루 전투를 겪은 나폴레옹을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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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역사의 변곡점이 된 가장 유명한 비는 1815년 6월 17일 밤, 워털루에 내린 비다.

벨기에 워털루 평원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밤새 내린 비로 전장은 거대한 진흙탕으로 변했고, 이는 나폴레옹의 주특기였던 포병대의 기동을 치명적으로 지연시켰다. 땅이 굳기를 기다리며 공격을 늦춘 그 몇 시간의 틈은, 결국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었고 프랑스 제국의 영원한 붕괴를 불렀다. 빗방울 하나가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비틀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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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는 <레미제라블> 2권 1부에서 워털루를 엄청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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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나비효과

"S'il n'avait pas plu dans la nuit du 17 au 18 juin 1815, l'avenir de l'Europe était changé.

1815년 6월 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는 밤에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바뀌었을 것이다.

Quelques gouttes d'eau de plus ou de moins ont fait pencher Napoléon."

몇 방울의 물이 나폴레옹을 쓰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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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의 본질

"Waterloo n'est point une bataille ; c'est le changement de front de l'univers."

워털루는 결코 단순한 전투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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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불능의 개인과 신의 뜻

"L'excessive pesanteur de cet homme dans la destinée humaine troublait l'équilibre. (...)

Il gênait Dieu. La chute de cet homme était décidée."

인간의 운명 속에서 이 사내의 과도한 무게는 우주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었다. (...)

그는 신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이 사내의 몰락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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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몰락한 제국의 폐허보다, 그가 제국을 '구축'해 냈던 고군분투의 궤적이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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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배신이 일궈낸 각성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코르시카는 원래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였다가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직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그는 태생부터 주류 프랑스인이 아닌 '피지배국의 이방인'이었다. 어린 시절 프랑스 본토의 브리엔 유년 군사학교와 파리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코르시카 억양의 프랑스어를 쓰고 돈도 없는 촌뜨기였던 그는 귀족 자제들에게 극심한 따돌림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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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고립에 굴복하지 않았다. 외로움과 분노를 '독서'로 승화시켰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영웅들의 역사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탐독하며 내면의 거대한 요새와 야심을 맹렬하게 키워나갔다. 이때 형성된 '아무도 믿지 않고 스스로 실력을 벼려내는 서늘한 기백' 이 훗날 그를 압도적인 지휘관으로 만든 근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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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늘한 기백이 완전한 현실주의로 각성한 계기는 조제핀과의 사랑과 배신이었다. 1796년 첫 이탈리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은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조제핀에게 맹목적이고 애절한 편지를 쏟아냈다. 그녀의 답장이 오지 않으면 텐트 안에서 오열하며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하지만 1798년 이집트 원정 중 파리에 남은 조제핀의 불륜(이폴리트 샤를)이 기정사실임을 완벽하게 깨달은 순간, 그의 내면에서는 거대한 단절이 일어난다. 낭만적 사랑과 타인에 대한 환상을 완벽하게 끊어낸 것이다. 형 조세프에게 다음과 같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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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voile est entièrement levé... 그 베일은 완전히 걷혔다...

Je suis ennuyé de la nature humaine! 나는 인간 본성에 진저리가 난다!

J'ai besoin de solitude et d'isolement. 나는 고독과 고립이 필요하다.

La grandeur m'ennuie, le sentiment est desséché, la gloire est fade.

위대함은 나를 지루하게 하고, 감정은 바싹 말라붙었으며, 영광은 무미건조하다.

À 29 ans, j'ai tout épuisé. 29세에, 나는 모든 것을 소진했다.

Il ne me reste plus qu'à devenir bien vraiment égoïste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진정으로 확고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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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메르 18일, 프랑스 혁명 10년의 마침표

이집트의 사막에서 차갑게 각성한 그는 1799년 11월 9일(프랑스 혁명력 브뤼메르 18일), 파리로 귀환해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사건은 단순한 권력 찬탈이 아니라, 이념과 낭만에 취해 있던 프랑스 대혁명의 시대를 물리적으로 닫아버리고 차갑고 건조한 '실무와 시스템의 시대'를 열어젖힌 극적인 변곡점이다.

※ <프랑스 혁명(1788.7.14-1799.11.9)>

프랑스 대혁명은 10년간 지속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1789년 7월 14일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폭발했다. 낡은 기득권 체제(앙시앵 레짐)를 무너뜨리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대한 이념을 향해 나아간 낭만과 피의 시작이었다. 이상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았지만 국가를 다스릴 실무 능력이 없었다. 빵은 부족했고, 경제는 파탄 났으며, 자신들과 이념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 정치'의 광기가 10여년간 이어졌다. 혁명 정부의 무능에 지친 대중 앞에 30세의 나폴레옹이 나타나 쿠데타를 일으켰다. "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이념의 시대를 닫고 행정과 시스템의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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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총재정부(Directoire)'는 부패하고 무능했다. 혁명가들은 광장에서 평등과 자유를 외쳤지만, 현실의 시민들은 빵이 없어 굶주렸고 국가는 파산 직전이었다. 이념이 물적 토대(경제와 행정)를 통제하지 못할 때 슬롯가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보여주는 실패한 이상주의의 표본이었다. 영국의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 경은 "좋은 것은 쉽게 파괴되지만, 결코 쉽게 창조되지 않는다(Good things are easily destroyed, but they are not easily created), 즉 부수는 것은 쉽지만, 쌓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혁명은 단 하루 만의 선동으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시민의 삶을 지탱하는 영토(시스템)를 구축하는 데는 뼈를 깎는 실무가 필요하다. 1789년의 혁명가들은 낡은 체제를 부수는 데는 성공했으나, 10년 동안 단 하나의 제대로 된 시스템도 쌓아 올리지 못한 채 단두대의 피비린내만 풍겼다. 이념이 행정과 자본이라는 물적 토대를 통제하지 못할 때 슬롯가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 10년의 광기를 끝낸 것은, 낭만적 구호를 버리고 기꺼이 '피를 말리는 실무'를 택한 나폴레옹의 차가운 시스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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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력 < 실행력

흥미로운 것은 이 쿠데타의 기획자, 에마뉘엘 조지프 시에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의 몰락이다. 노련한 정치인이자 지식인이었던 그는 부패한 의회를 엎어버리기 위해 '대중적 인기가 있는 군인의 무력'이 필요로 했고, 시에스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쿠데타를 완성할 '나의 검(Sword)'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쿠데타가 성공하고 권력이 공백 상태가 되자, 나폴레옹은 시에스의 검으로 남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즉각 새로운 헌법 기초 위원회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시에스를 허수아비로 밀어낸 뒤 스스로 '제1통령(First Consul)'에 올라 국가의 실권을 쥔다. 이론과 명분을 가진 설계자가, 물리적 무력(행정력)과 대중의 지지를 가진 집행자에게 완벽하게 잡아먹힌 역사적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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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2번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폰 파펜이 히틀러를 '다룰 수' 있다고 착각했던 지점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리를 지켜본 적이 있다. 시에스가 나폴레옹을, 파펜이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유는 '시스템과 룰(Rule)이 물리적 무력(행정력, 대중 동원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지식인 특유의 맹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기획안을 짜놓고, 자신이 고른 대리인이 그 역할만 수행한 채 조용히 사라지거나, 본인들이 그 대리인을 감히 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어리석고 순진한 사고방식이다. 현실의 아레나(Arena)에서는 언제나 피를 묻히며 실행을 감당하는 자(집행자)가 결국 모든 룰을 집어삼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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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비극과 영원한 유산(Legacy)

그는 무리한 러시아 원정(1812년) 실패 후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1814년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1815년,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를 역사에서는 '백일천하'라고 부른다. 유럽의 모든 국가(영국, 프로이센 등)는 즉각 그를 막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했고, 1815년 6월 18일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다. 전날 내린 폭우로 주특기인 포병 기동이 늦어졌고,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협공에 완벽하게 패배하며 제국은 영원히 붕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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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패배 후, 영국은 그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아프리카 연안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의 절해고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보낸다. 그의 말년(51세로 사망할 때까지의 6년)이 극도로 불행했던 이유는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실존적 붕괴'에 있었다. 섬의 총독이었던 허드슨 로는 나폴레옹을 '황제'가 아닌 '보나파르트 장군'으로 깎아내려 불렀고, 그의 산바카라 반경과 우편물까지 철저히 통제하며 그를 심리적으로 거세했다. 지독한 고독 속에서 그는 위암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가족조차 면회가 금지된 상태에서 과거의 영광을 구술하며 회고록을 남기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결국 세상을 통제하는 거대한 톱니바퀴를 쥐었던 남자는, 자기 자신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1821년 폭풍우가 치는 밤, 고독한 바위섬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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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단순한 전쟁광이나 실패한 독재자로 폄훼할 수 없다. 그의 진짜 위대함은 파괴가 아니라 '구축'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은 무너졌지만, 그가 이념의 광기를 잠재우고 차갑게 주조해 낸 실질적인 시스템들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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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체계화: 혁명 정부의 가장 치명적인 실패는 경제였다. 도덕적 명분과 이상주의만으로는 인플레이션과 국가 파산을 막을 수 없었다. 권력을 쥔 나폴레옹은 이념이 빵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서늘한 진실을 직시했다. 쿠데타 직후인 1800년, 그는 즉각적으로 프랑스 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한다. 화폐 발행권을 독점하게 하여 경제의 혈맥을 안정시키고, 신용을 창출하며, 국가 재정을 예측 가능한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자본이라는 물적 토대가 확보되지 않은 권력은 한낱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통찰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선의(善意) 대신, 가장 차갑고 견고한 '금고'를 국가의 중심에 놓고 자본의 물적토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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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영토 정비: 혁명가들이 탁상공론에 머물때, 파리의 거리는 오물과 악취로 가득했고 시민들은 전염병에 시달렸다. 나폴레옹은 파리의 지하를 파기 시작했다. 그는 도시의 핏줄인 하수도 망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우르크 운하(Canal de l'Ourcq)를 건설해 깨끗한 식수를 파리 시민들에게 공급했다. 진흙탕이었던 도로를 포장하고, 센강에 철제 다리를 놓았으며, 효율적인 우편 제도를 확립했다. 이러한 인프라 구축은 단순한 토목 공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는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발이 닿는 물리적 토대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행정가로서의 위대한 결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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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완성 : 가장 위대한 정점은 1804년에 반포된 민법전(나폴레옹 법전)이다. 당시 프랑스는 지역마다 수백 개의 낡은 관습법이 뒤엉켜 있어 극도의 혼란 상태였는데, 나폴레옹은 법학자들을 소집해, 혁명의 정신(법 앞의 평등, 재산권 보장, 실력주의)을 모호한 구호가 아닌 명확한 성문법으로 구체화했다. 그는 스스로도 이 업적의 위대함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는데, 세인트헬레나섬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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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vraie gloire n'est pas d'avoir gagné quarante batailles ;

나의 진짜 영광은 40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있지 않다.

Waterloo effacera le souvenir de tant de victoires.

워털루의 패배가 그 모든 승리의 기억을 지워버릴지도 모른다.

Ce que rien n'effacera, ce qui vivra éternellement, c'est mon Code civil."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나의 유산은 바로 나의 민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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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이후, 세인트헬레나섬 유배 시절까지 동행했던 충실한 측근이었던 장군인 몽톨롱 백작(Charles Tristan, marquis de Montholon)의 저서<세인트헬레나섬에서의 나폴레옹 황제 유배기 (Récits de la captivité de l'Empereur Napoléon à Sainte-Hélène, 1847)>에 기록되어 있다.



동시에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관으로 불리는 이유는 권력의 정점에 서서도 결코 '아레나(Arena)'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은 기득권을 향해서는 한없이 냉정했고, 병사들에게는 따뜻했다. 당시 화려한 막사에서 지도를 보며 탁상공론을 일삼던 늙고 거만한 장군들은 20대의 비쩍 마른 코르시카 촌뜨기 사령관 앞에서 식은땀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최전선의 병사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졌다. 총탄이 빗발치는 다리 위에서 진흙탕을 뒹굴며 대포를 조준하는 그를 보며 병사들은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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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가난한 이방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태생적 콤플렉스를 거대한 야심으로 승화시켰고, "모든 병사의 배낭에는 원수의 지휘봉이 들어있다"고 외치며 핏줄이 아닌 '실력'의 시대를 증명했다. 병사들이 열광했던 것은 권력자 황제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진흙탕을 뒹굴며 새로운 룰을 열어젖힌 '우리의 꼬마 하사관(Le Petit Caporal)'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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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자격지심을 야심으로 단련해 낸 자.

남이 만든 텐트에 숨지 않고 기꺼이 빗발치는 아레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영토(Altus Solum)가 된 자.

워털루의 폭우는 그의 제국을 씻어 내렸을지언정,

그가 벼려낸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맹렬한 기백만큼은 결코 지우지 못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진흙탕을 뒹굴며, 기어코 자신만의 룰을 제정해 내는

주권자의 궤적은 시공간을 초월해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