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마이클 샌델 <왜 도덕인가?>
크고 무거운 소형 김치냉장고가 레일을 타고 내려왔다.
운임이 고작 1,750원인데, 여기서 택배기사가 받는 몫은 30% 남짓이니 500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기가 막히는 일은 이런 부당한 운임에 대해 항의할 길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전략고객 상품이기 때문이다.
명절 특수기에 택배기사들에게 가장 힘든 일은 무거워진 짐을 나르는 것보다도, 배송할 물건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다.
평소라면 오전 11시쯤 끝나는데 오후 두, 세시가 넘어간다.
택배를 배송하는 속도는 총알이나 로켓처럼 빨리하라며 요구하는데, 정작 택배기사가 배송할 짐들은 점점 더 느리게 주어진다.
이런저런 불공정하고 부당한 처우를 참으며 밤늦도록 일해야 하는 몸은 한없이 고통스럽고 고단하기만 하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참 이상하다. 분명 똑같이 무거운 짐들인데 반응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들고 갈 때마다 달려 나와 받아주려는 유난히 친절한 디저트 카페가 있다.
그 마음과 모습에 감동해 나는 저절로 주방 앞까지 짐을 옮겨다 주게 된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노동에 대한 고마움과 베푸는 배려에 내 몸은 힘겨움을 잊어버린 듯하다.
이 작은 다정함이 내 몸의 피로를 씻어주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내 몸이 아프고 힘겨워하는 것이 단순히 크고 무거운 짐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파스와 진통제로 해결될 수 없는 내 몸의 통증은, 사실 이 슬롯가 노동자를 대하는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혈관을 타고 들어온 결과인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왜 도덕인가?>에서 ‘도덕과 철학의 언어’로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했다면,
김승섭 교수는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통해 그것을 ‘몸과 질병의 언어’로 현실화해 냈다고 볼 수 있다.
김승섭 교수는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슬롯의 시간이 새겨진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은 정직하게 슬롯를 기억하며, 말하지 못하는 상처들을 기억한 채 병들어 가고 있었다.
혐오, 차별, 고용불안과 같은 공동체의 구조적 폭력과 균열은 그저 추상적인 슬롯 문제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혈관을 타고 들어가 질병으로 발현된다.
우리는 종종 실패도, 가난도, 심지어 질병마저도 오롯이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폭력적인 슬롯를 마주한다.
현대 의학은 종종 개인의 질병을 유전자를 잘못 타고났다거나 관리를 소홀히 한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김 교수는 해고 노동자의 죽음이나 소수자의 우울증을 예로 들며, 건강을 잃는 것은 개인의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가 그들을 보호할 '도덕적 방파제(슬롯적 안전망)'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우리의 몸 자체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수준과 도덕성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물학적 진실이다.
그렇다면 내 몸이 건강한 것이 왜 내가 속한 공동체와 관련이 깊은 것일까?
그리고 인간의 몸이 지닌 의미와, 그리고 그 몸이 건강하다는 진정한 뜻은 무엇인 걸까?
김승섭의 슬롯역학적 측면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개인적인 노력보다 건전하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문화를 통해서 더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슬롯역학이란 슬롯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을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임.
몸이 건강하다는 의미는 단순히 잘 먹고 잘 관리해서 누리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철학적 해답을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에서 엿볼 수 있다.
샌델은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가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드는 현상을 우려하며, 모든 것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바카라임으로 환원하는 시장지상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오늘날은 경제적 효율성과 시장의 논리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려 하며, 오직 '가격'만 매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내려면, 시민들이 연대한 공동체가 '도덕적 한계선'을 그어주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샌델이 말하는 도덕은 단순히 착하게 살거나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과 ‘좋은 삶’이라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향한 공적인 가치 판단을 의미했다.
그는 현대 슬롯가 개인을 아무런 끈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로 바라보는 것을 단호히 부정하며, 인간을 '서사적 자아'로 부른다.
우리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녀이자 어느 공동체의 일원이며, 특정한 역사와 전통이라는 긴 이야기 속에 뿌리를 내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샌델에게 진정한 자유란 진공 상태에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서 주체적으로 나의 삶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자유로워 보여도 결국 자본의 논리에 휘둘릴 뿐이며, 공동체를 위해 바카라임을 다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부모를 돌보거나 이웃을 돕는 '연대의 의무'를 짊어질 때, 도덕은 개인의 삶을 고독에서 구원해 주는 가장 단단한 연결 고리가 된다.
샌델이 말한 ‘우리는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는 명제가, 김승섭 교수에 이르러 생물학적 진실로 완성되는 지점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며 살게 된다."
세상에 상처를 주고 아무런 죄바카라감 없이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며, 정작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을 성찰하지 않는다.
세상의 무례함에 상처받았을 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하고 자신이 왜 상처를 받았는지 질문을 해야 한다.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슬롯가 되어가는 것이 두렵고 싫을 뿐이다.
아름다운 슬롯란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슬롯,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슬롯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간직할 수 있기를, 그것이 가능한 삶을 살았으면 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본문 중에서
많이 힘들지만 그 상처에서 도망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터놓으며, 나의 경험으로 간직하라는 그의 말처럼 나는 오늘도 내 몸의 상처를 되새기며 글을 쓴다.
샌델에게 민주 시민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이웃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공공선을 위해 연대하는 것이다.
이를 김승섭의 건강의 관점으로 가져오면, 공동체의 연대와 도덕적 가치는 질병을 막는 곧 가장 강력한 '슬롯적 백신'이 된다.
195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작은 마을 '로세토' 사람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이웃 마을들에 비해 심장병 발병률이 턱없이 낮았다.
그 기적의 비결은 식습관이 아닌 '끈끈한 공동체'에 있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서로를 돌보는 이웃들, 즉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주민들의 몸을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되었던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 의식과 문화가 우리의 신체적, 슬롯적 상처들을 치유한다는 이 '로세토 효과'는 결코 먼 이국땅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대신 받아주려 달려 나오던 디저트 카페 사장님의 다정함에 내 몸의 고단함이 거짓말처럼 잊혔던 그 순간 역시,
타인과의 연대가 우리의 고단한 육체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보여주는 작고도 확실한 증거로 나에게 남겨져 있다.
결국 샌델이 말한 '도덕적 가치와 연대'는 단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의 숨을 붙어있게 하고 우리 몸을 질병으로부터 지켜내는 가장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생존 방식이다.
세상이란 곳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는 우리는 어차피 ‘상대편’에게도 '우리 편’에게도 상처를 입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상에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몸의 감수성에 오롯이 집중하며 살아가는 순간,
결국 이기심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인적인 삶이 된다는 의미를, 그리고 그것이 내 몸을 가장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 바카라들은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