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가리 소설 <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칠십 대 또는 팔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노년의 여인이 시끌벅적한 테이블 끝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명절이 끝나고 가족들과 함께 온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그녀는 며느리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 서로 애써 외면하며 자리를 지키느라 애쓰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시어머니가 돌보던 손주가 놀다가 다친 문제로 갈등이 생긴 것 같다. 또 다른 며느리는 양쪽 분위기를 살피다가 불편했는지 자신은 빨리 자리를 떠야겠다는 말을 흘린다.
식사를 마친 가족들이 다음 코스로 유명한 카페를 가자며 왁자지껄 일어선다. 머리가 새하얀 시어머니가 맨 마지막으로 서서히 따라나서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삶의 승차권이 더 이상 개찰구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로맹 가리의 소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제목부터가 하나의 강렬한 은유다.
기차를 타고 가다 유효기간이 끝난 표를 들고 있는 승객처럼, 인간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노화’와 ‘쓸모의 상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진짜 사랑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고도 처절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자크 레니에는 한때 유능한 사업가이자 매력적인 남자였고, 과거 레지스탕스로 활약했던 영웅이었다.
하지만 쉰아홉이라는 나이에 접어들며 급격한 육체적 쇠락과 발기부전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한다.
주인공 곁에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젊고 아름다운 연인 로라가 있다. 처음에 레니에는 그녀에게 완벽하고 강인한 남자로 남지 못한다는 수치심과 공포에 시달리며 깊은 고립으로 빠져든다.
평생을 흔들림 없는 현역으로, 또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아내야 했던 이들이 한 번쯤 겪게 되는 서늘한 두려움이다.
승차권의 의미는 젊음, 남성성, 슬롯적 영향력, 통제력처럼 한때 자신을 증명해 주던 모든 외적 조건들이다.
당시 62세였던 작가 로맹 가리는 묻는다.
“세상이 나를 증명해 주던 그 ‘승차권’의 유효기간이 끝났을 때, 나는 여전히 존엄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한 남자의 성적 좌절이 아니라, 누구나 언젠가 겪게 될 ‘육체와 슬롯적 쓸모의 한계’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을 통해 말한다. 젊은 날의 사랑이 힘과 매력, 즉 ‘승차권’을 과시하며 나누는 것이었다면,
노년의 사랑은 서로의 상처와 무력함,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을 온전히 인정하고 보듬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혼자서 강해지려 애쓰는 대신, 둘이서 함께 연약해질 용기를 낼 때 비로소 가짜 자존심을 벗겨낸 진짜 인간의 얼굴이 드러난다.
로맹 가리는 특유의 씁쓸한 유머와 페이소스를 통해, 늙어간다는 비극 앞에서도 우리가 끝내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적 품위(Dignity)를 이야기한다.
육체는 쇠락하고 슬롯적 유효기간은 끝나더라도, 한 인간이 살아온 궤적, 가슴속에 품은 긍지와 타인을 향한 헌신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비록 세상이 정해놓은 ‘승차권’은 만료되었을지라도, 내 곁의 단 한 사람과 나누는 진실한 연대와 사랑이 있다면 삶이라는 여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세상이 정해놓은 ‘승차권’이 만료되어 삶의 가장자리에 서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던 소소한 일상의 단면들이 커다랗게 다가온다.
새벽 공기의 냄새, 묵묵히 몸을 움직여 일하는 땀방울, 창밖을 바라보는 짧은 휴식,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파트 정원을 산바카라하는 발걸음이 소중해진다.
“산다는 것은 둘이서만 발견할 수 있는 비밀 같은 것이지. 행복은 팀을 이뤄야 하는 작업이야.”
세상이 주는 화려한 승차권이 없어도, 거친 길 위에서 서로의 손을 꼭 쥐고 나아가는 두 사람만의 호흡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진짜 비밀인 것이다.
나이 듦의 쓸쓸함은 완벽한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을 알아보고 가만히 곁을 내어줄 때 비로소 온기로 변한다.
그리고 늙어감은 결핍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을 ‘모든 것’으로 바꾸는 시선의 깊이를 얻는 순간이 된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삶의 승차권이 더 이상 개찰구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개찰구 바깥으로 밀려난 그 자리에서, 레스토랑 한구석에서 가족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나서던 그 하얀 머리의 노모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듯,
우리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타인의 눈을 바라볼 수 있는 진짜 여행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