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순환ㅡ순환열차입니다. 내려야 할 역을 찾습니다.
처음엔 그냥 피하려고 했다.
지하철에 탔을 때부터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남자는 마흔 즈음의 점퍼 차림이었고, 머리가 약간 부스스했다.
이어폰도 없이 핸드폰을 들고 서서는 뭔가를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
재미있는 영상 인듯했다. 깔깔거리는 영상 속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그것도 스피커폰으로.
주변 사람들이 슬쩍 바라보다가 짜증 섞인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를 더 키웠다.
소희는 그 사람 반대편 끝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거기까지 소리가 전해졌다.
'진짜…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냐… '
진짜로 짜증이 확 났다.
소희가 지하철에서 사람을 보며 이렇게까지 짜증을 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소희는 화면을 보다가 남자를 보았고, 다시 남자를 보다가 화면을 보았다.
ㅡ설마, 얘를?
ㅡ싫어.. 절대 … 안 해.. 절대!!!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Y/N)]
손가락이 멈춰 섰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희가 N 쪽으로 손가락을 뻗으려다 멈칫하자,
시스템이 그저 고요히 기다렸다.
ㅡ'… 이미 정해져 있구나… 진짜 싫은데….'
[Y]
눈이 떠졌을 때, 이번에도 소리가 먼저 다가왔다.
핸드폰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소희의 손이 그 소리대로 볼륨을 올렸다.
소희가 올린 게 아니었다. 몸이 멋대로 움직인 것이다.
'야, 야야 그만 좀 ㅡ.'
소희는 서둘러 볼륨을 낮추려 했지만,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강진우 때도, 혜미 때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이전의 몸들은 어떻게든 의지가 통했는데, 이 몸은 달랐다.
소희가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몸이 먼저 반대로 움직였다.
주변을 살피자 사람들이 이쪽을 힐끗거리고는 곧 시선을 거두었다.
그 시선을 받는 순간, 몸 안에서 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소희가 느끼기에도 그것은 일종의 '희열'이었다. '날 보고 있어'라는 그 감각.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이야?
소희는 그 낯선 감각에 잠시 멍해졌다.
아무도 자신을 봐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던 소희의 진짜 모습과 달리,
이 몸은 완전히 반대였다.
타인이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설령 그것이 혐오 섞인 시선일지라도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
'이 사람, 도대체 무슨 마음인 거야?’
환승역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자리가 생기자,
몸이 곧바로 빈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를 툭 벌리더니 옆 사람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소희가 버티려 애쓰자 몸은 오히려 더 벌어졌다.
다시 힘주어 당기면 몸은 또다시 제멋대로 벌어졌다.
어이없는 기싸움이었다.
옆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옮겼고, 그 반응에 또다시 희열이 올라왔다.
소희는 그 감각을 함께 느끼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건 아니다… 진짜… 이건 잘못된 거야.'
소희는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하지만 이 몸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한 정거장이 지나고 또 한 정거장이 지났다.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이쪽을 힐끗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의 몸을 빌린 소희는 계속해서 소리를 키운 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사람들이 아예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눈길이라도 주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예 폰을 들여다보거나,
눈을 감거나, 이어폰을 낀 채 완전히 투명한 배경처럼 대했다.
그 순간, 몸 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희열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풍선에서 바람이 쭉ㅡ 하고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감.
소희는 그 감각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아….'
이게 이 사람의 하루구나.
관종 같은 짓을 해서라도 시선을 받던 그 찰나의 순간이 이 사람한테는 전부였던 거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철저히 외로움.
내릴 역도 없이 그저 뱅뱅 돌고 있었다.
소희는 그 깊은 공허함 속에 함께 갇혀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완전히 제압한 것은 아니었고 몸이 순순히 말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글을 적는 것만큼은 허락되었다.
소희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서 자판을 두드렸다.
ㅡ남들이 봐줬으면 해서 이러는 거 알아.
근데 이렇게 하는 동안 정작 너에게 남는 게 없잖아
그 시간에 너를 찾는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이건… 아니야!ㅡ
모든 내용을 적고 나서 소희는 메모장을 조용히 닫았다.
이 사람의 행동이 절대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깊은 공허함 만큼은 소희가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오늘의 체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원래의 몸으로 귀환합니다.]
2호선. 신도림 방향.
소희는 손잡이 봉을 꽉 잡은 채 서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세계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소희는 생각했다.
저 남자는 나중에 메모장을 켜고 자기가 쓰지 않은 저 글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게 그 사람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건드릴 수도 있을까…
아니…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소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거기까지였다.
나머지는 그 사람의 몫이었다.
2호선은 오늘도 끝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내려야 할 역을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을 태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