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충족 ㅡ 충족되었습니다.
소희는 요즘 메모를 한다.
스마트폰 메모장. 제목은 '그냥'. 누가 볼까 봐 암호처럼 써두는 것들.
(강진우. 32세. 신도림 탑승. 아침 8시 12분. 선릉 하차.)
(서아영. 27세. 신도림 탑승. 아침. 잠실 하차.)
*공통점 — 2호선. 내가 먼저 눈이 간 사람. 뭔가 힘들어 보였던 사람. 티켓은 내가 [Y] 누르기 전에 먼저 떴음.
소희는 메모를 보다가 화면을 껐다.
이게 뭐라고 정리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우습긴 한데 멈출 수가 없었다.
강진우 과장 어깨에 새겨진 피로의 무게, 서아영 눈 밑에 담긴 밤샘의 흔적. 그게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자꾸 궁금했다.
왜 나일까ㅡ?
실험을 한 건 지난 목요일이었다.
소희는 일부러 1호선을 탔다.
신도림에서 갈아타지 않고 그냥 쭉 가보았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에어팟을 꽂고, 늘 하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스마트폰 화면은 그냥 스마트폰 화면이었다.
푸른빛도, 기계음도, 안내방송도 없었다.
소희는 내려야 할 역을 두 개나 지나쳐서 결국 다시 신도림으로 돌아왔다.
2호선 환승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지이잉—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소희는 화면을 봤다. 안 봐도 알 것 같았지만.
[체험 티켓이 발급되었습니다.]
[대상을 지정하시겠습니까? (Y/N)]
역시…
소희는 [N]을 눌렀다.
이번엔 음악이 끊기지 않았다.
아직 탑승 전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시스템이 오늘은 그냥 넘어가 준 건지.
소희는 플랫폼 벤치에 앉아서 생각했다.
2호선이야. 이 선에서만 뜨는 건가 봐.
순환선.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 도는 선.
왜인지는 몰랐다. 근데 그게 맞다는 건 알았다.
그다음 주 월요일, 소희는 에어팟을 꽂고 2호선에 올라탔다.
티켓이 떴지만 [N]을 눌렀다.
에어팟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직전, 소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ㅡ"
주변 사람들이 소희를 힐끗 봤다. 소희는 폰을 들어 통화하는 척했다.
"너 뭔데."
잠시 정적.
에어팟 속 음악이 뚝 끊겼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다음 역은—"
"그거 말고."
소희가 낮게 끊었다.
"왜 나한테만 뜨는 거야. 이거."
정적이 조금 더 길어졌다.
"...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소희는 눈썹을 올렸다.
"무슨 조건?"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야, 씹지 마.."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소희를 슬쩍 봤다. 소희는 창피한 척 고개를 숙였다.
에어팟 속은 다시 조용해졌다. 음악도, 안내방송도 없는 정적.
소희는 잠깐 기다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 끝.
소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으로 터널이 지나갔다. 어둡고 긴 터널.
근데 이상하게, 아까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조건이 있다는 건 인정한 거잖아... 시스템이 직접.
그럼 그 조건이 뭔지만 알면 되는 거 아니야?’
소희는 다시 메모장을 열었다.
(2호선에서만 뜸. (1호선 실험 결과) 내가 먼저 관심 가진 사람.)
(힘들어 보이는 사람. 조건이 있다고 시스템이 직접 말함. 근데 조건이 뭔지는 안 가르쳐줌. 당연히.)
소희는 마지막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이 선이 순환선인 거랑 관계있을까?)
시작도 끝도 없이 도는 선.
소희는 창밖을 봤다. 터널이 끝나고 다시 환한 역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내리고, 사람들이 탔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소희는 봉을 다시 잡았다.
일단 더 해봐야 알겠지.
에어팟에서 음악이 다시 흘러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희는 픽 웃었다.
'얘 은근히 얄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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