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만 아름다운
남고에 다녔던 큰아이는 고등학교 3년 간 기숙사에 머물렀다. 기숙사생 부모들은 조를 짜서 돌아가며 아이들이 출출해질 밤시간에 간식을 준비해 기숙사동에 있는 도서관을 방문했다. 한창 몸집이 커지는 시기이니 잠시 휴식을 취하며 허기를 채우는 간식 시간은 떠들썩한 활기와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3년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아이들을 만나다 보니 큰아이의 친구들에게도 정겨운 마음이 가고 해가 바뀔 때마다 쑥쑥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부모들과도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졸업식 날 정장에 코트를 입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아이들의 얼굴은 새롭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대학 입학을 앞둔 설 연휴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친구들을 만나러 간 큰 아이의 귀가시간이 제법 늦어지더니 친구집에서 하룻밤 자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큰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들과 곧 집으로 갈 테니 떡국을 끓여달라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떡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큰 냄비를 꺼내 육수를 내고 김장김치를 새로 꺼내 써는 동안 새벽눈을 고스란히 맞은 장정 다섯이 들이닥쳤다. 아직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들은 빨갛게 얼어있고 코트는 녹아내린 눈으로 물기가 촉촉했다. 친구들과 밤새 눈 속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풋풋한 청춘들의 싱싱한 청량감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잘 먹겠습니다!” 씩씩한 인사와 함께 뜨거운 떡국으로 몸을 녹이던 아이들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킥킥대며 웃는 사이에 아침이 서서히 밝아왔다. 그리고는 새벽공기를 마시겠다며 또 집을 나섰다. 참으로 지치지도 않는 체력과 생동감에 웃음이 절로 났다.
대학생 시절 큰아이가 집에 다니러 오면 의례히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는데 화제는 특히 연애사에 집중되곤 했다. 그날도 식탁에 앉아 친구들이 잘 지내느냐고 묻자, 큰아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혁이 말이에요.” “응, 혁이가 왜? 걔 연애는 잘 되고 있대?”
“헤어졌대요.”
“어머! 어떡하냐? 쯧쯧.... 첫 연애 아냐? 괜찮대?” 큰아이가 또 웃기 시작했다.
“아니 술자리에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얘기했거든요.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그날은 다들 많이 마셨다고 한다. 자취방으로 맥주를 사 와서 2차까지 걸치고 자정이 넘어서야 이불속으로 몸을 뉘었는데, 잠결에 ‘끄윽 끄윽’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였더니 겨우 울음을 참는 듯한 ‘끄윽 끄윽’ 소리가 계속 나더라는 것이다. 일어나 보니 머리까지 덮어쓴 혁이의 이불이 가만가만 들썩거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떡하니! 혁이가 많이 힘들었나 보네.”
“애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깼어요.”
“그래서? 잘 위로해 줬어? 숨죽여 울다니 너무 딱하다.”
다들 일어나 앉아서 혁이의 들썩이는 이불을 쳐다봤다고 한다. 그리고는 한 목소리로 혁이를 놀려대며 이불을 마구 두들겨 주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니들은! 우는 친구한테!”
“아니, 괜찮다더니 울잖아요. 하하하하”
다들 벌떡 일어나서 그게 울어야 할 일이냐고, 너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잔다고, 발로 툭툭 차며 조용히 못하냐고 놀렸더니 혁이가 급기야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크게 웃으며 이불을 잡아당기고 '울보' 노래까지 불렀단다.
그런데 갑자기 혁이가 "아이씨!" 하며 이불을 홱 집어던지고, 눈물 번진 얼굴을 치켜들고는 "니들이 뭘 알아!" 소리를 쳤단다. 그리고는 더 크게 깔깔대는 친구들을 향해 본인도 실실대더니 이내 배를 잡고 웃더라는 것이다. 큰아이는 슬롯인이 되어 사내 동기와 짝을 맺었고, 친구들 모두 가정을 꾸렸다. 대학시절 내내 '울보'라고 놀림받던 혁이도 번듯한 온라인 게임인이 되어 올봄에 짝을 만나서 결혼을 했다.
둘째 아이가 어제는 ‘청모(청첩장을 주려 만나는 모임)’에 다녀온다며 집을 나섰다.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을 한단다. 둘째의 친구들도 우리 집에서 자고 간 아이들이 꽤 있다. 해외에 정착한 친구들, 대학원에 다니는 친구, 취준생들과 이직을 준비하는 친구들. '청모'에 누가 오느냐고 물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얼마나 반가울까.
자정 넘어 톡이 왔다. 새벽에 택시 타고 들어온다고, 친구 준이도 같이 온다고. 준이는 출중한 외모에 모델 같은 친구다.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나가본 현관에 아이들의 운동화가 가지런하다. 술기운에 세상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을 것이다. 서른이 넘은 준이는 또 얼마나 많이 변해있을까.
오늘 아침엔 무와 황태채로 구수한 국물을 내고 콩나물을 팍팍 넣어서 해장국을 끓여야겠다. 청춘의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그 고단함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도록. 찰진 밥과 함께 식탁에 올리고 오랜만에 잘생긴 준이의 얼굴을 들여다봐야겠다. 둘째 아이 친구들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웃음 나는 얘깃거리를 남겨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