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발맞추기 2

미국에서

by하양데이지

여름방학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미국 내 연수프로그램을 다녀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잠자코 듣던 남편이 말했다.

“그럼 다녀옵시다!”

“언제요?”

“당신 방학하자마자. 2주 뒤에.”


부랴부랴 항공편과 여행상품을 뒤져 LA에서 출발하여 미서부를 돌아보는 패키지 상품을 현지 여행사에 예약했고 LA에 도착해 합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후 3일은 자유여행을 하기로 했다. 남편은 국제운전면허증을 준비하고 미국의 도로교통법을 열공했다.


서부지역 6일간의 패키지여행을 마치고 LA공항 인근에 위치한 호텔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지도를 펼쳤다. ‘지도 한 장에 의지한 대장정’이 또 시작된 것이다. 첫 여행지는 샌디에이고다.


운전을 위해 당시에 길을 찾는 최신버전을 준비했다. 남편은 차를 몰고 나는 휴대폰으로 구글지도를 보며 방향을 잡아주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올드타운 역사공원을 거쳐 USS 미드웨이 박물관을 둘러보고, 코로나도 비치를 걷고, 라 호야 비치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없다며 점심은 건너뛰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판기 소시지로 허기를 달래고 생수에 의지해 돌아다니다가 라호야 비치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6시 무렵이었다. 둘 다 급속도로 체력이 고갈되며 당이 떨어졌다.


계획한 투어를 위해 여행지에서 끼니를 거르고 목적지를 향해 마냥 액셀을 밟는 남편이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허기가 심해지고 기운이 떨어지니 남편에 대한 원망이 슬금슬금 커져가고 있었다. 마침 발견한 편의점과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섰을 때, 점원은 영업이 끝났다며 나를 밀어내고 현관에 있던 'open' 팻말을 'closed'로 바꿔버렸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쳤으나 초콜릿 하나도 사지 못했다. 국내는 24시간 영업하는데...... 출발 전 미리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남편은 육중한 체구에 기력이 소진되었다는 신호를 연신 보내면서 시야도 흐려져 더 이상 운전을 못하겠다며 해변 근처에서 캠핑을 하고 있던 가족들을 가리켰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입을 열었다.


“저기 가서 어린아이 머리를 쓸어주며 “너 참 예쁘다.” 해주고 소시지 하나만 얻어와.”

“네?”

“빨리 갔다 와. 나 배고파 죽겠어, 이 사람아.”

“여보, 내가 저기 가서 아이를 만지면 저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럼 아이를 만지지 말고 그냥 소시지만 좀 얻어와. 우리 사정을 설명하고 식당 문을 닫았으니 요기할 만큼 도와달라고 해봐, 지금 배가 고파 죽겠다고 해.”


리옹에서는 노래를 하라더니 라 호야에서는 소시지 동냥을 하란다. 목표한 곳을 다 돌아보겠다는 그놈의 야심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여행이 매번 이 모양이다. 우리는 밤 8시가 넘어서야 지명도 알 수 없는 다운타운 빵집을 찾아 허기를 달래었고, 주변에 영업 중인 마켓에서 비상식량과 음료와 과일을 잔뜩 사가지고 트렁크를 채운 뒤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은 파머스마켓을 돌아보고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거쳐 할리우드 스타들이 바닥에 흔적을 남긴 거리를 걸었다. 나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을 소중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 리뷰와 추천으로 정한 곳이었다. 그러나 계획했던 시간보다 일정이 늦어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8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브닝드레스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훤칠한 남성들이 간접조명의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와인잔을 부딪치고 있을 때 우리도 테라스에 위치한 테이블에 착석했다. 샐러드부터 메인 요리의 드레싱과 소스를 선택하고 식사가 나올 때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시계를 보던 남편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오늘 목표는 그리피스 천문대까지 봐야 하는데 식사가 언제 나오느냐며 목이 길어졌다.


마침내 식사가 나오기 시작할 때 그가 말했다.

“15분! 그 안에 빨리 먹어요!”

메인 식사가 나왔을 때는 10분도 남지 않았다.

“여보, 우리 여유 있게 천천히 식사하고 그리피스 천문대는 내일 가면 안 될까요?”

“안돼! 내일은 일정이 따로 정해져 있잖아. 대충 빨리 먹어 치웁시다.”


내가 포크를 내려놓고 남편을 바라봤다.

남편은 나를 빤히 보더니 포크와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탁탁' 내려 놓고는

“나 안 먹어!” 팔짱을 끼고 나를 본다. 단단히 화가 났다.

체념하며 남편을 달랜다.

“그냥 드세요... 얼른 먹으면 되지...”

“안 먹는다고!”


또 저녁을 못 먹는다. 직원에게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직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셰프가 쫓아 나온다. 음식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고 계산을 했다.

‘그때 리옹에서 끝장을 봤어야 했는데.....’


그리피스 천문대 언덕을 향해 남편이 속도를 올렸다.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며 화를 삭이느라 한숨만 쉬어댔는데 도착했더니 캄캄하다. 건물 보수공사 관계로 휴관일이다. 쌤통이다 싶으면서도 자포자기의 짜증이 밀려왔다. 설상가상으로 빠르게 내려간 기온 탓에 LA 시가지 빌딩 숲은 안개가 자욱해서 꿈속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입국하고 며칠 후, 미국에서 고속도로 전용차선을 위반했다는 범칙금 고지서가 우편함에 도착했다. 고지서를 펼치다 보니 낯선 땅에서 사흘간 내리 운전하던 고집쟁이 남편의 긴장과 피로가 느껴졌다.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다음에는 미대륙을 운전하여 횡단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그에게 혼자 다녀오시라고 상냥하게 거절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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