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포와 여수밤바다

기억의 왜곡

by하양데이지

남편이 존경하는, 인품이 뛰어나신 은사님이 계시다. 은사님 댁이 가까운 거리로 이사를 오셨다. 근거리에 사시던 3년여의 기간 동안 은사님 내외와 참 많은 곳을 함께 다녀왔는데, 그중 만리포는 잊히지 않는 곳이다.


만리포가 가까워지며 뒷좌석에 나란히 자리하신 두 분은 차창을 열어 바닷바람을 만끽하셨다. 은사님의 반짝이는 은발이 바닷바람에 살살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만리포를 얼마 만에 온 거야. 정말 많이 변했지, 여보? 세월이 무상하구만.”

사모님이 대꾸하셨다.

“무슨 소리예요? 난 만리포에 온 적이 없는데. 오늘이 처음이에요.”

“무슨 소리야? 이 사람이 까먹었구먼!”

사모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라고요! 난 처음 온다고요. 당신 누구랑 왔었어요? 여자였어요? 여자였나 보네. 나랑 헷갈리는 걸 보니.”


얼른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뒷좌석을 향해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바다 오시니 좋으시죠?”

은사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시더니

“아니! 당신이랑 왔잖아. 그때 여기 포장마차 같은 것도 있었고, 소주도 한 잔 하고. 기억 안 나?”

“아니라구욧! 도대체 어떤 여자랑 와놓고 나랑 헷갈리는 거예요? 와서 술도 마셨어요? 많이 좋았나 보네.”


수습이 안된다. 은사님이 얼른 수습하셔야 한다. 여기가 아니었다고. 그냥 헷갈렸다고. 그런데 일이 점점 심상치가 않다.

“아니! 당신, 나이 먹으니까 까맣게 잊었어? 그때 같이 왔었잖아. 그날 당신 치마 입고....”

“아니라구욧!” 사모님의 앙칼진 비명이 터졌다.

“치마 입은 것까지 기억해요? 어떤 사이였길래 입성도 다 기억하면서 그게 나인지 다른 여자인지도 몰라욧!”


‘하.... 낭패다....’ 횟집을 들러 어색한 식사를 뒤로 하며 2시간이 넘게 걸렸던 귀갓길에 두 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 부부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앞만 보고 왔다. 만리포는 금지어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남편이 '그 스승의 그 제자'가 되었다. 여수로 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온 아들이 ‘여수밤바다 캔맥주’ 세트를 기념품으로 사 와 건넸다. 저녁 식탁에 반주로 제격이다.


“너 갓김치 먹고 왔어? 돌산 갓김치 먹어보라고 했잖아.”

남편의 말에 아들이 맞장구를 친다.

“그럼요!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리고 식당 아주머니들 입담도 장난이 아니었어요. 저희 갔던 식당이 뼈해장국집이었는데, 어떤 손님 한 분이 아주머니를 부르시더라고요. 다 먹고 보니 자기 뚝배기에 뼈가 하나 모자랐다고요”

“어머! 진짜?”


아들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가 그 손님 식탁으로 가셔서 뼈를 세 보시더라고요. 근데 진짜 일행보다 뼈가 하나 모자란 거예요.”

“그래서?”

“아주머니가 ‘다 지 팔자랑께.’ 하셨어요. 그런데 손님도 웃으면서 받아주시더라고요. 아주머니가 음료수를 갖다 주셨어요.”

깔깔깔 웃으며 저녁식탁이 무르익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내가 노래를 불렀다.

“여수밤바다~ 음음음음음~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모르는 가사는 음음음이다. 맥주 맛에 흡족해하던 남편이 불쑥 물었다.

“당신 그 노래 누가 부른 줄 알아?”

“그럼요! 버스커 버스커가 불렀잖아요.”

“아니야, 이 사람아! 누가 그래! 그 버스 뭐가 불렀다고?”

“맞아요, 여보! 벚꽃엔딩 부른 그 사람! “봄바람 휘날리며~ 랄랄랄라 랄랄라라~ 이거 부른 사람이 불렀다고요!”


남편이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여수밤바다 부른 사람 누군지 알지?”

“그럼요, 장범준이 원곡자예요. 여수 여행하는 내내 그 노래만 나오던데요.”

남편이 정색을 하며 의자 깊숙이 고쳐 앉는다. 팔짱까지 꼈다. 표정이 ‘오늘 나한테 잘 걸렸어.’다.


“여태 누가 부른 지도 몰랐구먼! 그건 1980년대에 나온 노래야. 아들! 너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노래라고.”

잽싸게 인터넷을 검색했다.

“여기 보세요! 원곡자가 장범준이라고 나와 있잖아요!”

“허허! 이 사람아! 인터넷에 나온 거 다 믿으며 안돼!”

아들이 슬그머니 의자를 빼서 식탁에서 일어난다.

“잘 먹었습니다.”

도망을 간다. 아버지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이기는 걸 아는 탓이다.


남편의 시선이 공중으로 향하더니

“기다려봐. 내가 불러줄 테니까. ‘여수밤바다’는 처음에 여수가 나오질 않아요!”

“네? 아니~ 그럼 어디가 나와요? 부산이 나오나? 목포가 나와요?”

“앗! 좀 조용히 해보셔! 지금 노랫말이 생각나려다가 당신 때문에 잊어버렸잖아.”

“아니, 여보!”

“앗! 좀 조용히 하라니까! 아... 생각날라고 하는데... 그게.... 아......”


어이가 없었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남편의 얼굴이 환해진다.

“아 생각났어.... 그게 여수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야.”

남편이 허밍으로 음을 대강 잡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며 배꼽을 잡았다. 남편의 눈이 동그레진다.

“왜? 왜 웃어?”

“여보! 그건 바위섬이잖아요!”

“어? 그게 바위섬이야? 여수밤바다가 아니야? 난 여태 여수밤바단 줄 알았는데?”

남편이 머쓱한 얼굴로 씨익 웃는다. 그렇게 정색을 해놓고선 이토록 빠른 인정이라니.


설거지를 하다가도 킥킥 웃음이 나와서 바위섬아저씨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 말 나온 김에 여수 갓김치 드시고 싶으세요?”

“아냐. 내가 맛있다고 했지, 언제 먹고 싶다고 했나?”

설거지를 마치고 갓김치를 주문했다. 이틀 후면 도착이다. 분위기를 역전시키려 또 어떤 엉뚱한 열변을 할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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