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금주의 추억
퇴근하는 남편의 손을 본다. 빈손이다. 진안주에 맛난 반찬을 준비했는데 캔맥이 아쉽다. 냉장고에 보관된 담금주 마지막 병을 꺼내왔다. 더덕으로 담근 술. 진한 갈색이다. 둘째 아이 군 입대 기념으로 담갔는데 전역한 지 10년이 지났으니, 저녁 식탁에서 추억 삼아 수다 떨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시기에 꽂히는 테마가 있는 것 같다. 40대의 나는 장아찌와 담금주에 빠졌다. 두꺼운 유리 항아리가 거실 한편을 가득 채웠다.
야생 더덕을 공수해서 더덕주를, 깨끗한 겨우살이로 겨우살이주를, 황금빛 도는 황매실로 매실주를, 실한 야관문을 사다가 야관문주를 담갔다. 야생 더덕과 겨우살이는 품질이 좋은 놈으로 산을 타시는 지인을 통해서만 구입했다.
소주 도수 35도, 2리터가량을 두세 통씩 들어가도록 담아, 그늘진 뒤쪽 베란다에 이름표를 붙여 나란히 세워놨다. 아들이 오랜만에 들러 줄을 선 술독을 발견하고는, 우리 집 반 쪽은 시골집 같다며 휘둥그레한 눈으로 구경을 하고 다녔다. 모든 항아리에 담금 연월도 써붙였다. 살다 보니 바빠서 잊기도 하는 통에 세월을 삭히며 술은 저절로 익어갔다.
야생 더덕은 모양도 멋질 뿐 아니라 향까지 기가 막혀 지인과 동료들의 뜻깊은 날, 적당한 술병을 구입해 더덕 한 두 개를 넣고 술을 채워 선물하면 다들 환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별도로 구매 문의까지 왔을 때는 어깨가 으쓱했다. 애주가인 여성분들에게 달달한 매실주를 선물하면 함박웃음이 번졌다.
당시 온라인 게임생활 1년 차였던 큰 아이가, 주말에 집에 다녀 간다기에 다 같이 모여 더덕향을 즐겨볼까 궁리를 했다. 담금주 항아리에 써붙인 포스트잇을 보니 벌써 5~6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큰아이는 더덕향이 근사했는지, 이번 주중에 있을 회식 자리에서 팀장님과 부서원들에게 맛을 보이고 싶은데, 이 더덕주를 좀 가져가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어디 더덕주뿐이겠니!”
작은 병들을 죄다 끌어모았다. 그리고는 더덕주, 매실주, 야관문주, 겨우살이주를 300미리 정도씩 나누어 담았다. 아들에게 각 병에 담긴 술이 무슨 술인지 알려주었다. 색깔과 향이 다르니 아들은 금방 그 술이 무슨 술인지 익혔다.
그리고 아들에게 회식이 무르익을 무렵 마치 와인을 마시고 포도의 품종을 맞히는 것처럼, 이 술을 마시고 무슨 술인지 알아맞히는 게임을 해도 재미있겠다는 아이디어도 보태주었다. 아들은 작은 술병 네 개를 소중히 담아서 돌아갔다. 회식 자리에서 나름 소박한 즐거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들을 배웅했다.
일주일이 지난 주말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로의 안부를 전하다가 남편이 물었다.
“회식은 잘했어? 요즘 사람들은 담금주를 별로 안 좋아하지?”
아들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난리도 아니었어요. "
"아니, 왜?"
"제가 네 가지 담금주를 다 소개했거든요. 그중에 조금씩 드셔보고 맞혀보시라고요. 처음에는 다들 신나 하셨어요. 분명히 담금주라 도수가 세다고 했는데, 야관문주랑 겨우살이주는 향이나 맛이 완전 양주 같다면서 이거 양주 아니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는데도 계속 서로 마셔보고 또 마셔보라고 하고 갸웃갸웃하면서 완전히 바닥까지 다 비우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 날 두 분이 결근하셨어요. 그래서 팀장님이 저를 따로 부르셨어요. 다음부터 회식 장소에 담금주는 절대 가지고 오지 말라고......”
아들은 억울해하면서도 웃음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아니! 제가 분명히 담금주라고! 이렇게 드시면 안 된다고 했다니까요! 그런데......”
우리 부부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꼭 다물었다.
“그래, 업무 하느라 회식 하느라 애썼다. 주말이니 푹 쉬거라.”
아들의 전화를 끊고 우리는 신속하게 합의를 봤다.
“여보 담금주는 선물은 그만하고, 우리끼리 쉬엄쉬엄 즐깁시다!”
오늘 마지막 병이 식탁 위에서 비어져 간다. 이제 건강과 체력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담금주는 오늘로써 마감하기로 했다. 가끔 와인으로 풍미를, 맥주로 상쾌함을 즐기자며 담금주에게 영영 작별을 고했다. 담금주가 추억이 되는 순간이다. 마지막 건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