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하시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904호 여사님은 포스부터 남다른 여장부셨다.
일단, 엘리베이터 내부 손잡이에 허리를 기댄 채 짝다리를 짚고 계신다. 번쩍이는 큐빅이 큼직하게 박힌 진보라색 안경테와 짙은 회색 렌즈, 그보다 더 진한 검정으로 눈가에 길게 뽑은 아이라인,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고급스럽고 큰 진주 귀걸이와 계절과 조화를 이루어 목을 감싸는 화려한 꽃문양의 명품 머플러나 스카프,
진보라나 진초록 슈트를 대담하게 소화하시는 맵시에 날렵하고 비비드한 구두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20대가 명함도 내놓지 못할 비주얼을 자랑하셨다.
어느 한 가지를 허투루 걸치지 않으시는 60대 후반, 904호 여사님은 말투도 세련된 반말이셨다.
- 출근길 -
“출근하시나 봐?”
“네.”
“내외 사이가 참 좋아 보이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녀오셔.”
“네, 다녀오세요.”
- 퇴근길 -
“퇴근하시나 봐?”
“네.”
“사장님은?”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이번에 차를 바꾸셨던데?”
“아...... 네......”
“그럼 올라가셔.”
00 생명 지사장이라고 본인을 소개하셨던 904호 여사님은 한 마디로 포스와 간지의 대명사였다. 처음에는 예의 바른 거리감으로 경계했고 오래 이웃으로 지내다 보니 저절로 반가운 인사가 건네졌다.
그분을 못 뵌 지 한참이 지났지만 의식조차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분리수거를 마치고 온 남편의 말은 이러했다. 우리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 904호 여사님이 계셨다고 한다. 같이 1층으로 내려갔는데 남편만 내리고 여사님은 다시 올라가시더니 돌아오는 길에 1층 엘리베이터 안에서 또 마주쳤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여사님은 각 층 버튼을 누르고 취소하기를 반복하시다가 본인 집이 몇 층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9층을 눌러드리고 4호로 들어가시라 했다는 것이다.
“그 여사님이?”
“그러게 말이야......”
오랜 기간 함께 산 이웃이기에 우리 부부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런데 엊그제 오후,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1층 현관 앞에서 여사님과 마주쳤다. 순간, 남편의 말이 떠올랐지만 여느 때와 같이 밝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평소와는 달리 수더분하게 무채색으로 옷을 입은 여사님도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하셨다.
나는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얼른 벗고 ‘저예요, 저!’라고 말하듯 활짝 웃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후, 9층을 눌러드렸다.
여사님이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셨다.
“날이 너무 더워졌지요? 벌써 한여름이에요.”라며 너스레를 떠는 내게
여사님이 물으셨다.
“그래요. 그런데...... 여기 언제부터 사셨어요? 얼마 전에 이사 오셨어요?”
“저...... 여기에.......”
머뭇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사님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시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셨다.
“안녕히 가세요.”
“네, 네. 들어가세요.” 나도 허리를 깊이 숙였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틈 사이로 여사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당황스럽고 먹먹했다.
“운동 갔다 오시나 봐?”
“사장님은?”
이라고 물으셨을 여사님은 이제 먼 여행을 시작하시는 듯하다.
호방하고 당차게 엘리베이터 안의 분위기를 압도하던 자신의 모습은 이미 잊으셨을 것이다. 세월과 시간에 순응하여 두 손을 공손히 모으신 여사님은 내가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실 것이다.
봄햇살처럼 따스한 보살핌과 평온이 그분의 작은 등에 머물기를 바라는 나는 여사님의 옛 모습이 못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