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그리움이 머무는 곳
프라하, 그리움이 머무는 곳
2부. 프라하에서 살아간다는 것
제9화
6구역 우리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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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이 가득했던 3층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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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6구역.
우리가 살던 마르틴 씨 댁은 프라하에서도 꽤 높은 지대에 있었다.
3층으로 된 오래된 주택이었고, 우리가 머물던 곳은 맨 위층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한쪽 벽면을 거의 가득 채운 통유리창이었다.
아침이면 그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커튼을 열지 않아도 방 안이 환해졌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햇빛이 거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바닥 위에 길게 누웠다.
창밖으로는 프라하 6구역의 지붕들과 나무들이 내려다보였다.
도심 한가운데의 화려한 풍경은 아니었다. 까렐교도 보이지 않았고 구시가지의 천문시계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풍경이 참 좋았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프라하였다.
아침이면 출근하는 사람들이 집을 나섰고, 아이들은 학교로 갔다. 정원에서는 누군가 나무에 물을 주었고, 저녁이면 하나둘 집으로 돌아왔다.
그 평범한 일상을 3층 창가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나도 잠시 이 도시의 주민이 된 것 같았다.
집에는 피아노도 한 대 있었다.
그 피아노를 집 안으로 들여놓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좁고 비좁은 나선형 계단을 지나 3층까지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 큰 피아노를 그 계단으로 옮겼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피아노와 첼로가 함께 놓여 있는 거실은 우리에게 작은 음악실이 되었다.
재림이가 첼로를 켜는 날이면 그 소리가 통유리창을 지나 프라하의 하늘로 흘러나가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한국에서 살던 우리가 프라하의 어느 높은 언덕 위 집에서 피아노와 첼로를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가끔은 현실 같지 않았다.
분수에 넘치도록 좋은 집이었다.
나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고,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허락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딱 1년이었지만 그 집은 프라하에서 우리가 가장 오래 마음을 붙이고 살았던 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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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를 놓치게 하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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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이에게 6구역의 집은 마냥 좋은 곳만은 아니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이 멀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나가 다시 트램으로 갈아타야 했고 때로는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첼로까지 메고 다니는 아이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 여기 너무 멀어.”
가끔 재림이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불편함조차 재미있었다.
프라하에 오면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기다리고 트램을 갈아타고, 정류장 이름을 하나씩 외워가는 것도 외국에서 살아보는 재미라고 여겼다.
집에서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는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무척 좋아했다.
하얀 나무 울타리가 둘러진 집들이 이어졌고 울타리 안에는 저마다 다른 꽃이 피어 있었다.
장미가 가득한 집도 있었고 이름을 모르는 작은 꽃들이 정원을 가득 채운 집도 있었다.
나는 걸어가다가 자꾸 멈춰 섰다.
‘이 집은 참 예쁘다.’
‘저 꽃은 무슨 꽃일까.’
남의 집 정원을 기웃거리는 일이 조금은 실례일 수도 있었지만, 낯선 나라의 집과 정원은 내게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러다 보면 버스가 지나갔다.
“엄마, 버스!”
재림이가 말하면 이미 늦었다.
“아이고, 또 놓쳤네.”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또 기다려야 했다.
재림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 기다림도 싫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마을 소식을 알리는 게시판이 있었다.
작은 음악회나 행사, 동네 모임 같은 것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문제는 모두 체코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는 단어 몇 개와 그림을 가지고 내용을 추측했다.
한참을 들여다본 뒤 나름대로 해석이 끝나면 재림이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재림아, 이거 다음 주에 여기서 음악회 한다는 것 같은데?”
재림이가 포스터를 한번 읽어보고는 웃었다.
“엄마, 그거 아니야.”
“그럼 뭔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놈의 체코어가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그래도 나는 다음 날이면 또 게시판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틀리고 또 틀리면서 프라하에서 하루하루를 배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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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 울타리의 작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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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 거의 다다를 즈음 우리가 꼭 멈추는 집이 하나 있었다.
특별히 화려한 집은 아니었다.
낮은 담장과 소박한 정원, 그리고 장미가 예쁘게 피어 있는 평범한 집이었다.
그 집에는 작은 강아지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우리 모습이 보이면 어디선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담장에 앞발을 올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짖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가 반갑다는 듯 온몸으로 아는 척을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개를 무서워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강아지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또 나왔네.”
내가 가까이 가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더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조금만 보고 가야지 하면서도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버스를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림이는 이제 체념한 듯 말했다.
“엄마, 또 버스 갔어.”
“다음 거 타면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그 강아지가 고마웠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나는 때때로 외로웠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재림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길었다.
그런 내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반갑다고 달려오는 작은 생명이 있었다.
내가 체코어를 못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나타나면 반가워했다.
가끔 집주인 부부가 정원을 가꾸다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도브리덴.”
나는 아는 체코어를 총동원해 인사했다.
발음이 맞는지 자신도 없었지만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면 그들도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작은 강아지가 나를 조금씩 그 동네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 같다.
다시 프라하에 간다면 그 집 앞에 한번 서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집주인과 차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싶다.
그때 당신 집의 작은 강아지가 낯선 한국 여자에게 얼마나 좋은 친구였는지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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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첼로를 메고 걷던 동양인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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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던 동네는 프라하 6구역에서도 높은 지대에 있었다.
전직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의 생가가 있던 마을이기도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어서 동양인을 자주 볼 수 있는 동네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재림이와 나는 제법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첼로를 메고 다니는 날이면 더 그랬다.
커다란 첼로 케이스를 등에 멘 동양인 남학생과 그 옆을 따라가는 엄마.
지금 생각하면 동네 사람들 눈에도 꽤 특이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첼로 덕분인지 사람들은 우리에게 유난히 따뜻했다.
지나가다가 첼로를 한번 바라보고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었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체코 사람들에게 음악은 생활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악기를 들고 지나가는 모습도 자연스러웠고, 그 악기를 공부하는 젊은 학생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가끔 생각했다.
‘우리가 첼로를 메고 있어서 조금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닐까.’
한번은 길을 걷다가 경찰관과 마주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동양인을 보면 여권이나 신분증을 확인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런데 재림이가 첼로를 메고 있는 것을 본 경찰관은 우리를 한번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웃었다.
‘오늘도 첼로 덕을 보네.’
재림이에게 첼로는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학교까지 몇 번씩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들고 다녀야 했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놓고 갈 수 없는 악기였다.
하지만 그 첼로 덕분에 낯선 사람과 연결되기도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프라하에서 첼로는 재림이의 악기이면서 때로는 우리의 명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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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이면 데스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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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은 장을 보는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을 한꺼번에 사기 위해 재림이와 데스코에 갔다.
집 근처에는 큰 상점이 없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트램으로 갈아타고 또 걸어야 했다.
갈 때는 괜찮았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주일치 장을 한꺼번에 보면 짐이 엄청났다.
우유와 과일, 채소, 고기, 빵을 사고 생수까지 사는 날이면 봉지가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재림아, 이것 좀 들어.”
“나도 많이 들었어.”
둘이 서로 무거운 봉지를 미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결국 중간중간 길가 담장 아래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손가락을 펴고 허리를 한번 두드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면 남의 집 정원이 보였다.
꽃을 가꾸던 동네 사람이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잠시 쉬었다 다시 짐을 들었다.
집에 도착해 냉장고를 가득 채우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됐다. 이제 일주일은 안 굶겠다.”
그리고 이상하게 장을 본 날에는 라면이 먹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거의 먹지 않던 음식이었다.
그런데 프라하에서는 라면 냄새만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체코 음식을 며칠 먹어 속이 느끼해진 날에는 더욱 그랬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라면 두 개를 넣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익숙한 냄새가 작은 부엌에 퍼졌다.
“엄마, 계란 넣어.”
“알았어.”
그렇게 끓인 라면을 둘이 마주 앉아 먹었다.
별것 아닌 한 끼였다.
그런데 국물 한 숟갈을 먹으면 갑자기 한국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프라하에서 라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고향이었고,
익숙한 냄새였고,
낯선 나라에서 잠시 마음을 쉬게 해주는 작은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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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 작은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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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 오후였다.
재림이와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작은 카페 하나를 발견했다.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유명한 곳도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이 편하게 들르는 작은 가게였다.
“우리 여기 한번 들어가 볼까?”
재림이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흑맥주 한 잔과 윙을 주문했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데가 있었네.”
마치 대단한 비밀 장소라도 찾아낸 사람들처럼 좋아했다.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작은 발견 하나가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집 가까운 곳에 마음 편하게 들어갈 카페 하나를 알아두는 것.
맛있는 빵집을 찾는 것.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야 가장 빨리 집에 갈 수 있는지 알아가는 것.
그런 것들이 모여 낯선 도시가 조금씩 생활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카페에서 나왔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 블타바 강 쪽으로 하나둘 가로등이 켜졌다.
낮 동안 환했던 길 위로 푸른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그런 시간이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낮에는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던 프라하가 해가 지면 갑자기 낯선 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 생각이 났다.
집 생각도 났다.
두고 온 사람들이 궁금했다.
재림이는 말없이 내 옆을 걸었다.
나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이 나란히 작은 마을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프라하를 떠올리면 유명한 관광지보다 그 저녁길이 먼저 생각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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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몰랐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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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6구역의 생활이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교통이 불편했고 장을 보려면 멀리 나가야 했다.
버스를 한번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집까지 걸어야 했다.
재림이는 매일 첼로를 메고 학교를 오갔다.
나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동네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상하다.
프라하에서 살았던 여러 곳 가운데 가장 많이 생각나는 곳이 바로 그 동네다.
통유리창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던 집.
비좁은 나선형 계단.
거실 한쪽의 피아노.
재림이의 첼로 소리.
버스 정류장까지 이어지던 오솔길.
하얀 나무 울타리.
정원에 핀 장미.
우리만 보면 달려오던 작은 강아지.
토요일마다 무거운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걸었던 길.
집에 돌아와 둘이 끓여 먹던 라면.
그리고 어느 주말 우연히 발견한 작은 카페에서 마셨던 흑맥주 한 잔.
그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생활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였다.
그래서 사진도 많이 남기지 않았다.
내일도 그 길을 걸을 줄 알았고,
다음 주에도 그 강아지를 만날 줄 알았으며,
토요일이면 다시 장을 보러 갈 줄 알았다.
그 시간이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삶에서 오래 남는 것은 언제나 그런 날들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모르고 무심히 지나쳐 버린 평범한 하루.
프라하 6구역의 작은 마을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따뜻해진다.
다시 그곳에 간다면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고 싶다.
장미 울타리 앞에도 오래 서 있고,
버스 한 대쯤은 그냥 보내도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집 앞에 서서 3층의 통유리창을 올려다보고 싶다.
어쩌면 그 창문 너머로,
첼로를 연습하는 유학생 아들과 그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던 한 엄마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 것만 같다.
그 시절에는 몰랐다.
그 불편하고 조금은 외로웠던 날들이 훗날 이렇게 그리운 시간이 될 줄은.
프라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한 도시의 풍경 속에 우리의 평범한 하루를 하나씩 남겨두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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