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그리움이 머무는 곳
까렐교 아래 두 마리 백조
■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
프라하에 살면서 거의 매일 해가 질 무렵이면 들르는 곳이 있었다.
까렐교였다.
낮에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다리도 저녁이 가까워지면 조금씩 표정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빛이 달라지고 공기가 달라졌다.
블타바 강 건너 프라하성에는 하나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강물 위에는 노을과 성의 불빛이 길게 흔들렸다.
나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시간만 되면 꼭 찾아보는 존재들이 있었다.
까렐교 아래의 백조들이었다.
백조들은 한 무리로 몰려 있다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강 건너편으로 천천히 이동하곤 했다.
그런데 그 많은 백조들 사이에서 유난히 내 눈에 들어오는 두 마리가 있었다.
둘은 늘 함께 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까이 붙어 다니지는 않았다.
한 마리가 앞서가면 다른 한 마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너무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날개가 닿을 만큼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참 생뚱맞았다.
‘같이 다닐 거면 좀 붙어 다니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그들을 보다 보니, 어느새 그 두 마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오늘도 왔을까.
조금 늦게 도착한 날에는 강물부터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마리가 여느 날처럼 떠 있는 것을 발견하면 괜히 마음이 놓였다.
그저 백조 두 마리일 뿐인데.
그들은 내 하루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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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닿지 않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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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 백조는 참 이상했다.
서로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한 마리가 방향을 바꾸면 다른 한 마리도 잠시 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 마리가 물속으로 머리를 넣었다가 다시 올라오면 다른 한 마리는 그 옆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쩌면 사람 사이도 저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늘 사람 사이의 거리를 어려워했다.
좋아하면 가까이 있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먼저 전화해 주고,
밥은 먹었는지 물어봐 주고,
오늘은 어땠는지 궁금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 작은 표현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 적은 사람은 어렵게 느껴졌다.
표현이 없는 사람 곁에서는 자꾸만 마음이 목말랐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무심할까.’
‘왜 조금 더 다정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서운해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까렐교 아래의 두 마리 백조는 매일 내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은 붙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져 있지도 않았다.
각자의 물결을 타고 움직이면서도 늘 서로가 보이는 거리 안에 있었다.
그게 참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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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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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있다는 건 뭘까.
매일 연락하는 것일까.
늘 같은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일까.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
백조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 위를 떠다녔다.
한 마리가 조금 앞서가면 다른 한 마리가 따라갔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모습에는 불안함이 없었다.
저 둘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누가 먼저 가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져 있어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해 보였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사랑에도 거리가 있을 수 있겠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야만 사랑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
필요할 때 돌아보면 거기에 있는 것.
그것 역시 함께하는 방식일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백조를 보면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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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기 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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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를 떠나기 전날이었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두 마리 백조를 다시 보는 것이었다.
평소보다 일이 늦어져 까렐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급해졌다.
‘오늘은 꼭 봐야 하는데.’
거의 달리다시피 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프라하성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블타바 강 위에는 노란 불빛과 붉은 불빛이 길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늘 서 있던 곳으로 갔다.
그리고 서둘러 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백조가 없었다.
마음이 순간 허전해졌다.
‘벌써 갔나.’
마지막인데.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어 강 이쪽저쪽을 오래 살폈다.
눈이 어둠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강 건너쪽 가까이에서 흰색 물체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백조 한 마리였다.
“아, 저기 있네.”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한 마리뿐이었다.
나는 금세 다른 한 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평소에는 늘 둘이었는데.
혹시 오늘은 혼자 왔나.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참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매일 잠깐 보는 백조 두 마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쓰였다.
한참 강물을 바라보다가 조금 더 멀리 시선을 옮겼다.
그때 보였다.
다른 한 마리가.
역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앞의 백조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이상할 만큼 마음이 놓였다.
“그래, 같이 있네.”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둘은 여전히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그 모습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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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붙어 있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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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두 마리 백조를 보며 문득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떠올렸다.
오래 알고 지냈지만 여전히 말이 적은 사람.
먼저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사람.
밥은 먹었는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그런 말을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무심함이 늘 서운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았고,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늘 돌아왔다.
말없이.
거창한 표현 없이.
뚱한 얼굴로 커피 한 잔을 내밀고,
내가 좋아하는 크루아상을 말없이 사다 놓고,
필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내 곁에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방식과 달랐을 뿐이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두 마리 백조도 그랬다.
붙어 있지 않지만 함께 있었다.
서로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거리.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날 나는 그 사실을 조금 늦게 배웠다.
사랑은 때때로 가까움보다 지속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자주 말하지 않아도,
늘 손을 잡고 있지 않아도,
끝까지 같은 방향을 향해 가는 것.
그것이 사랑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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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격이 있어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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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까울수록 더 많이 기대한다.
기대가 커지면 서운함도 함께 커진다.
나는 늘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랐다.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차려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혼자 마음속에서 상처를 키웠다.
그런데 두 마리 백조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함께 갔다.
조금의 간격을 둔 채.
생각해 보면 그 간격 때문에 서로를 더 잘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상대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떨어져 있어야 바라볼 수 있다.
표정을 볼 수 있고,
방향을 볼 수 있고,
상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내가 서운해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방식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었다.
누군가는 말로 사랑하고,
누군가는 음식으로 사랑하고,
누군가는 기다림으로 사랑하고,
누군가는 말없이 같은 자리에 있는 것으로 사랑한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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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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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비행기는 프라하를 떠났다.
고도를 높이자 도시가 점점 작아졌다.
붉은 지붕과 오래된 건물들,
프라하성과 구시가지,
그리고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블타바 강.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오래 내려다보았다.
어딘가에는 어제 보았던 두 마리 백조도 있을 것 같았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오늘도 한 마리가 조금 앞서고, 다른 한 마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비행기가 더 높이 올라가자 강도 점점 가늘어졌다.
나는 문득 웃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프라하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길인지도 몰랐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느냐고 매일 묻지 않아도,
결국 내가 돌아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생각해 보니 그들은 늘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프라하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들의 무심함 속에 숨어 있던 다정함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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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마리 백조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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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런데도 가끔 까렐교 아래의 두 마리 백조가 생각난다.
정말 같은 백조였을까.
매일 같은 시간에 온 것이 맞을까.
이제 와 생각하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기억 속에는 늘 두 마리가 있다.
한 마리가 앞에서 천천히 헤엄치고,
다른 한 마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간다.
그리고 두 마리는 끝내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모습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았다.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
가까이 있다고 반드시 깊은 것은 아니며,
조금 떨어져 있다고 반드시 멀어진 것도 아니라는 것.
사랑은 때로 서로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걸어갈 공간을 남겨주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아무리 거리가 있어도 결국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그 사실을 프라하에서 배웠다.
수많은 성당과 궁전,
오래된 건축물과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까렐교 아래 말없이 떠 있던 두 마리 백조에게서.
지금도 가끔 누군가가 내 마음만큼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때면 그 백조들을 떠올린다.
조금 떨어져 있어도 괜찮다고.
서로가 보이는 거리라면 괜찮다고.
그리고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오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블타바 강 위로 저녁이 내리고,
두 마리 백조는 오늘도 천천히 같은 방향으로 헤엄쳐 간다.
나는 이제 그들의 거리가 더 이상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함께하기 위해 서로에게 남겨둔 작은 여백처럼 보인다.
어쩌면 사랑은 바로 그 여백 속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