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그리움이 머무는 곳
해 질 녘의 프라하성
■ 해 질 무렵이면 강으로 갔다
해 질 녘의 블타바 강가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낮의 프라하와 저녁의 프라하는 같은 도시이면서도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면 프라하성의 오래된 벽과 지붕 위로 엷은 황금빛이 내려앉았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면 성은 마치 아주 오래된 그림 속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래서 프라하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해 질 무렵이면 까렐교와 블타바 강가를 찾았다.
까렐교 아래로는 강물이 말없이 흘렀다.
사람들은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었지만, 다리 아래의 강은 그런 소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천천히 흘러갔다.
그 위에는 두 마리의 백조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두 마리는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헤엄쳤다.
한 마리가 앞으로 나아가면 다른 한 마리가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너무 가까이 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조금 생뚱맞아 보였다.
‘같이 다닐 거면 좀 붙어 다니지.’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백조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서운해졌다.
오늘은 왔을까.
나도 모르게 다리 아래를 먼저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두 마리가 평소처럼 강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면 이상할 만큼 마음이 놓였다.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어느새 그것은 나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작은 의식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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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매일 프라하성으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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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재림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내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18번 트램을 타고 블타바 강을 건너 프라하성으로 갔다.
누가 어디에 가느냐고 물으면 농담처럼 말했다.
“나도 출근해.”
내 온라인 게임은 회사도 학교도 아니었다.
프라하성이었다.
트램 창밖으로 지나가는 도시를 바라보는 일도 좋았다. 오래된 건물과 골목, 정류장마다 오르내리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타는 젊은 엄마와 장바구니를 든 노인들까지 조금씩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의 일상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 풍경 속에 섞여 있었다.
프라하성 입구 언덕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그곳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길에서 조금 벗어난 정원이 하나 있었다.
프라하성 부속 별궁의 정원이었다.
나는 그곳을 마음속으로 ‘비밀의 정원’이라고 불렀다.
처음 그곳을 발견한 날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프라하성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갑자기 소리가 멀어졌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이어졌고 길가에는 이름도 모르는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잘 가꾸어진 꽃밭과 분수 사이에는 하얀 나무 의자가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개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큰 개만 보면 얼어붙는 나에게 그 정원은 그야말로 안식처였다.
‘이런 데가 있었네.’
나는 처음 그곳을 발견한 사람처럼 기뻐했다.
물론 프라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겠지만, 내게는 아무도 모르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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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의자와 크루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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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도착하면 늘 비슷한 자리를 찾았다.
햇볕이 너무 강하지 않고 나무 그림자가 적당히 드리워지는 하얀 의자였다.
가방에서 바카라을 꺼냈다.
그리고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커피와 점심으로 가져온 크루아상, 사과를 옆에 내려놓았다.
그것이 내 하루의 전부인 날도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부족하지 않았다.
바카라을 몇 장 읽다가 눈을 들면 작은 새들이 발밑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내가 빵을 먹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들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너희도 먹고 싶어?”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새들에게 말을 걸며 크루아상 부스러기를 조금 떼어놓곤 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작은 새들이 날아왔다.
멀리서는 프라하성 경호원이 천천히 걸어 다녔다.
나는 가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웃었다.
‘이 정도면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독서실 아닌가.’
프라하성의 경호를 받으며 바카라을 읽고 커피를 마시는 여자.
한국에 돌아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과장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내 하루는 정말 그랬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바카라을 읽다가 생각에 잠기고, 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바카라을 읽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 앉아 있기도 했다.
낯선 나라에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나를 조금씩 편안하게 만들었다.
아들의 유학생활을 곁에서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그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없었다.
연습이 힘들어도 대신 연습해 줄 수 없었고, 언어가 힘들어도 대신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 정원으로 갔다.
아이의 삶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조금 내려놓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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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의 끝에서 다시 만나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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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을 읽다 보면 어느새 햇빛의 색깔이 달라졌다.
정원의 나무 그림자가 길어지고 꽃밭 위로 비스듬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바카라을 덮었다.
“오늘도 많이 있었네.”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혼잣말을 하며 가방을 챙겼다.
정원을 나와 프라하성을 한 바퀴 돌았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언덕길로 내려가면 도시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붉은 지붕들이 아래로 펼쳐지고 그 너머로 블타바 강이 보였다.
멀리서 보면 프라하는 참 조용한 도시 같았다.
하지만 강 가까이 내려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라 스트라나를 지나 까렐교에 가까워지면 도시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관광객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 사진을 찍는 사람들, 그림을 파는 화가들, 작은 공예품을 늘어놓은 상인들.
그리고 음악이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까렐교의 거리 예술가들도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낮과 밤이 교대하는 짧은 시간.
프라하성이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고, 거리의 가로등은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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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렐교 위에서 만난 네 대의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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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 스트라나 쪽에서 구시가 방향으로 까렐교를 걸으면 두세 군데쯤에서 꼭 음악을 만날 수 있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도 있었고 작은 밴드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기다리던 연주자들은 따로 있었다.
네 명의 첼리스트였다.
운이 좋은 날이면 까렐교 위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재림이도 그들을 알고 있었다.
같은 스승에게 배운 선후배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들의 연주를 들을 때면 낯선 거리의 음악가가 아니라 재림이의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네 대의 첼로가 동시에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첼로 한 대의 소리도 깊은데 네 대의 첼로가 함께 울리면 까렐교의 오래된 돌바닥까지 낮게 떨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췄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가던 가족도 멈추고, 사진을 찍던 관광객도 카메라를 내렸다.
나도 사람들 틈에 서서 연주를 들었다.
그들이 자주 연주하던 곡 가운데 내가 특히 좋아했던 곡은 파사칼리아였다.
그 음악을 프라하성을 바라보며 들었다.
강 건너 성에는 하나둘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블타바 강에는 그 빛이 길게 흔들렸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도 잊었다.
그저 음악 속에 서 있었다.
‘이래서 내가 프라하를 좋아하는구나.’
그때는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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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 끝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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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늦은 시간까지 연주를 듣고 나면 그들도 악기를 정리했다.
한번은 연주가 끝난 뒤 근처 맥도널드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그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까렐교에서 연주를 하던 연주자들이 첼로 케이스를 옆에 세워두고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나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굳이 다가가 말을 걸 지 않아도 눈인사속에 많은
대화가 오가곤 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들의 여정을 그려본다
아마 재림이도 언젠가 저렇게 악기를 들고 낯선 도시 어딘가에서 연주하고, 늦은 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음료수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망설이다
끝내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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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이 내리는 프라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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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렐교를 다 건너기 전 나는 자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프라하성에는 어느새 불이 모두 켜져 있었다.
낮에는 돌과 벽으로 이루어진 오래된 성이었는데 밤이 되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성 같았다.
그 불빛이 블타바 강 위로 떨어졌다.
강물은 빛을 그대로 품지 않았다.
흔들고, 부수고, 다시 이어 붙이며 흘려보냈다.
나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베마리아가 들려오는 날도 있었다.
매번의 연주자와 악기는 달랐지만 프라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였다
그 음악이 까렐교의 돌기둥 사이를 지나 강 위로 흘러가고, 어둠 속의 프라하성과 섞이는 순간이 좋았다.
한국에 있을 때 음악은 늘 나에게 공부이거나 일이었다.
잘 연주해야 했고, 가르쳐야 했고, 틀리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프라하에서는 음악이 그냥 길 위에 있었다.
사람들은 걷다가 멈춰 들었고 마음에 들면 동전을 놓고 다시 자기 길을 갔다.
음악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 자유로움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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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은 나중에 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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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평범한 하루들이 가끔씩 그리워진다
아침이면 18번 트램을 타고 프라하성으로 가던 일.
하얀 의자에 앉아 크루아상을 먹으며 바카라을 읽던 일.
발밑으로 다가오는 작은 새들을 바라보던 일.
해가 기울면 바카라을 덮고 성벽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던 일.
까렐교 위에서 첼로 소리를 듣고 블타바 강에 비친 프라하성을 바라보던 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되고 나니 가장 평범했던 장면들이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프라하에서 돌아온 지도 여러 해가 흘렀다.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혀 한동안 유럽에 갈 수 없었던 시간도 지나갔다.
시간이 흘러도 프라하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가끔 눈을 감으면 지금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트램에서 내려 언덕을 오르고,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 하얀 의자를 찾아 앉는다.
보온병의 뚜껑을 열면 따뜻한 커피 냄새가 올라온다.
그리고 오후가 지나면 다시 블타바 강으로 내려간다.
까렐교 어디쯤에서는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지고 있을 것이다.
다시 그곳에 서서 어둠이 내리는 프라하성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 서 있고 싶다.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프라하는 그렇게 내 안에 남았다.
다녀온 도시가 아니라,
언젠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