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그리움이 머무는 곳
제2화
엄마 프라하가 슬퍼요
■ 프라하에도 슬픔이 있었다
프라하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이의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이면 악보와 첼로를 챙겨 학교로 향했고, 늦은 오후나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면 잠시 쉬는 대신 다시 첼로를 꺼냈다.
방문이 닫히고 나면 같은 구절을 반복하는 첼로 소리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한 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같은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연주했다. 자정을 훌쩍 넘긴 뒤에야 활이 멈추는 날도 많았다.
학교에 다니고, 연습하고, 다음 날 다시 학교에 가는 생활.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엄마의 눈에는 작은 변화들이 보였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는 전보다 말수가 줄어 있었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교수님과 나눈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곤 했는데, 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도 짧게 대답했다.
“그냥 똑같았어요.”
“괜찮아요.”
그 말 뒤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침묵이 따라왔다.
밥도 예전처럼 먹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을 차려 주면 반가워하기는 했지만, 몇 숟가락을 뜨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좋아하던 음식 앞에서도 입맛이 없다며 물러났고, 연습을 마친 뒤에는 피곤하다는 말만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공부와 연습이 많아 지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유학생활 끝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피로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을 오래 바라볼수록 단순한 피곤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빛이 자주 먼 곳에 머물렀다.
창밖을 바라볼 때면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풍경 너머 다른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묻고 싶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힘드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고, 한국에 돌아오고 싶으냐고 물으면 아이를 더 흔들어 놓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방 안을 따뜻하게 해 놓는 일만 반복했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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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프라하가 슬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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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이었다.
해가 기울면서 프라하의 붉은 지붕 위로 옅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블타바강 건너편에는 하나둘 불빛이 켜졌고, 프라하성의 윤곽도 저녁빛 속에서 서서히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뒤에서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재림이가 창가에 서서 나를 불렀다.
“엄마.”
평소보다 낮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재림이는 창밖을 향한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사람처럼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엄마, 프라하가 슬퍼요.”
처음에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라하가 왜 슬퍼?”
아이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다 슬퍼 보여요.”
잠시 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블타바강도 슬프고…….”
“프라하성도 다 슬퍼요.”
창밖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프라하가 펼쳐져 있었다.
관광객들은 까렐교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고, 강물 위로 유람선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성당의 첨탑과 붉은 지붕, 오래된 골목과 성의 불빛은 한 장의 엽서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 아름다움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아름다운 풍경은 마음속 외로움을 더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슬픈 것은 프라하가 아니었다.
그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었다.
오랜 시간 홀로 버티며 마음속에 쌓아 둔 외로움이 도시의 모든 풍경 위로 번지고 있었다. 강물이 슬픈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슬펐고, 프라하성이 쓸쓸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이 깊이 지쳐 있었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아이는 얼마나 오래 혼자 견뎠을까.
나는 선뜻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힘내라는 말도, 조금만 더 견디라는 말도 그 순간에는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그저 아이 곁으로 다가가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블타바강 위로 저녁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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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둘 떠나고 혼자 남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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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이가 처음 프라하에 왔을 때만 해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프라하 음악원 입학을 준비하며 까렐대학교 부속 어학원에서 체코어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온 교환학생 형과 누나들이 있었다. 일본 학생들도 함께 공부했다.
모두가 낯선 언어 앞에서 같은 실수를 했고, 알아듣지 못한 수업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길을 헤매고, 체코 음식을 낯설어하고,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의대생 형과 누나도 있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타국 생활은 훨씬 견딜 만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체코어만 듣다가 누군가와 한국말을 나누는 짧은 시간은 작은 고향과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교환학생들의 체류 기간이 끝나면서 형과 누나들은 하나둘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의대생들도 학교의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황에서 더는 과정을 계속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재림이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어렵게 입학한 학교라고 해서 반드시 끝까지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립학교는 학비가 지나치게 비쌌고, 국립학교는 입학하기도 어렵지만 들어간 뒤 모든 학점을 체코어로 받아야 했다. 외국인에게 언어의 장벽은 단순히 불편한 문제가 아니라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현실이었다.
함께하던 사람들이 떠나고 나자 재림이는 프라하 음악원에 홀로 남았다.
학교에는 한국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도 편하게 한국말로 하루를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같은 처지를 이해해 줄 친구를 찾기 힘들었다.
함께 공부하던 일본 학생들은 이미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음악 활동을 하다가 다시 공부하러 온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학위와 진로에 대한 부담도 재림이와는 달랐다.
하지만 재림이는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에 해당하는 모든 과정을 마쳐야 했다.
졸업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프라하에서 보낸 세월은 어느덧 5년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2년을 더 견뎌야 했다.
지나온 시간도 길었고, 남아 있는 시간도 짧지 않았다.
아이에게 프라하는 더 이상 낯선 여행지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살아 익숙해졌지만 끝내 자신의 집은 되지 못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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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보다 높았던 체코어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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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음악에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악보는 세계 어디에서나 같고, 연주자는 소리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재림이에게 전공 실기와 음악 관련 수업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입학시험에서도 체코어로 음악사와 전공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했으며, 교수의 설명을 이해하고 레슨을 따라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전공 실기 성적은 늘 우수했다.
오랜 연습 끝에 연주도 눈에 띄게 성장했고, 교수들은 재림이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음악원 생활은 첼로만 잘한다고 끝나는 과정이 아니었다.
체코 문학과 체코 역사 같은 일반 교과목도 모두 이수해야 했다. 자국 학생들과 똑같은 강의를 듣고, 같은 교재를 읽고, 체코어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일상생활에서 체코어로 대화하는 것과 문학 및 역사를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일은 전혀 달랐다.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 머릿속에서 먼저 영어로 옮긴 뒤 내용을 이해해야 했다. 낯선 지명과 인명, 역사적 사건이 빠르게 이어지면 문장을 따라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바카라 한 페이지를 읽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단어를 찾고, 문장을 해석하고, 그 뜻을 다시 이해해야 했다. 한국 학생이라면 내용만 공부하면 될 일을 재림이는 언어부터 풀어낸 뒤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밤을 새워 공부해도 시험지를 받으면 아는 내용이 낯선 문장 속에 숨어 버렸다.
전공에서는 과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을 만큼 인정받았지만, 체코 문학과 역사 과목에서는 F학점을 겨우 면하는 경우도 있었다.
담당 교수에게 불려가 경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재림이는 한동안 그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다.
내가 걱정할까 봐 혼자 감추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 전공은 괜찮은데 체코 역사하고 문학이 너무 어려워요.”
아이가 말한 ‘어렵다’는 단어 안에는 많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
공부가 힘들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 장학생으로서 반드시 일정한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 그리고 혹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자국 학생에게도 입학이 쉽지 않은 프라하 음악원이었다.
그곳에서 6년 전액 국비장학금을 받는 외국인 학생에게 학교가 요구하는 기준은 냉정했다.
아이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틈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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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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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가 머무는 동안 집안일을 해 줄 수 있었다.
따뜻한 밥을 차리고, 밀린 빨래를 하고, 쌓여 있던 설거지를 끝낼 수 있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을 채워 놓고, 지친 아이가 돌아왔을 때 방을 따뜻하게 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이 대신 체코 문학 시험을 치를 수는 없었다.
아이 대신 낯선 교실에 앉아 하루 종일 체코어 강의를 들을 수도 없었다.
연습실에서 혼자 견뎌야 하는 수많은 시간과 아무도 없는 방으로 돌아오는 쓸쓸함도 대신 살아 줄 수 없었다.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 많은 것을 대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넘어지면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 아프면 약을 먹이며, 길을 잃으면 데리러 갈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자기 삶의 길로 들어가고 나면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길 앞에서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매일 밤 조용히 기도했다.
‘주님, 제가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길이라면 이 아이에게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주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끝내지 못해도 살아서 건강하게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 말을 정작 아이 앞에서는 쉽게 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먼저 약한 마음을 보이면 아이가 지금까지 버텨 온 힘마저 놓아 버릴까 봐 두려웠다.
엄마인 나도 아이처럼 조용히 버티고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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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첼로는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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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재림이는 첼로를 놓지 않았다.
수업에서 지적을 받고 돌아온 날에도 연습실로 향했다. 시험공부로 밤을 새운 다음 날에도 활을 들었다.
전공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첼로는 아이를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이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학교와 언어, 외로움은 아이를 자꾸만 바깥으로 밀어냈지만, 첼로 앞에 앉으면 자신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를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
방문 틈으로 낮고 깊은 첼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같은 음을 수없이 반복하는 연습 소리였다. 때로는 거칠고 답답하게 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소리 안에 아이의 마음이 조금씩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문밖에 가만히 앉아 연주를 들었다.
말로는 꺼내지 못한 외로움과 분노, 두려움과 그리움이 첼로의 낮은 음 속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저 아이는 음악으로 버티고 있구나.’
그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프라하가 슬프고, 블타바강도 프라하성도 쓸쓸하게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이 모든 시간이 아이의 음악 안에서 다른 빛으로 남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그날 창가에서 아이가 했던 말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엄마, 프라하가 슬퍼요.”
나는 그 문장을 들으며 비로소 알았다.
차에서 뛰어내릴 만큼 첼로를 간절히 원했던 아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그 간절함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시간이 있다는 것을.
다음 이야기는 그 아이가 왜 그렇게까지 첼로를 놓지 못했는지, 우리가 처음 음악이라는 길 앞에서 얼마나 오래 서로를 밀어냈는지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https://youtu.be/v-JN96nrHKQ?si=YD1qfwRj4SffEw6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