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껌에 관한 고찰
어린 조카는 창가에 앉아 울고 있었다. 왜 우냐고 물으니 자기만 불쌍하단다. 엄마 아빠는 돈이 있는데 자기만 돈이 없어서.
"돈이 필요해? 뭐 하려고?"
"돈이 있으면 풍선껌도 살 수 있잖아."
"껌 엄마가 사주잖아."
"엄마가 사줘야만 하잖아."
아!
당시 스물을 갓 넘긴 내 머릿속엔 늘 독립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내 눈에는 자주권을 주장하는 아이의 요구가 정당해 보였다. 돕고 싶었다.
"언니! 얘도 용돈을 좀 줘."
언니는 코웃음을 쳤다.
"슈퍼에 혼자 못 가는데?"
껌을 먹은 조카는 곧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니 조카와 대화를 할 게 아니라 이모로서 그냥 껌을 사주면 되는 일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고립을 경험했다. 그때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육아는 바카라으로 독학했다. 잠시라도 도망갈 곳이 필요했다. 《녹색평론》 독서모임에 나갔다. 남편이 일찍 퇴근해 애를 봤지만, 내 마음은 반의 반만큼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낯선 사람들 낯선 장소 오랜만의 외출이었으니 도착부터 피곤했다.
모임의 기존 회원 중 한 명이 미취학 어린이를 데리고 왔다. 무척 피곤해 보였다. 다른 회원에게 하는 하소연을 들으니 종일 징징대고 밥도 안 먹더니 여기 와서는 저렇게 해맑게 노는 거라고 했다. 나오기 전에 슈퍼에 들러 껌을 하나 사줬더니 기분이 확 바뀌었다고. 뭐가 잘못된 건지 생각하느라 종일 괴롭던 자기 고민은 껌과 함께 날아갔다고.
내 육아는 현재 진행형이다. 종종 이 두 가지 껌 사건을 떠올린다. 세상을, 페스츄리처럼 아슬아슬한 겹겹의 층위가 쌓인 모양으로 조망할 때 특히 그렇다. 아이와 어른은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슈퍼에 다니지만, 그 세계가 같지 않을 때가 많다. 비단 아이와 어른에게만 이 세계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차이는 다른 층위의 차이보다 그 틈이 넓다. 껌이면 해결되는 세계, 껌 하나면 뒤끝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계와 도무지 내 껌이 뭔지 확신할 수 없는 세계의 차이랄까. 백지 위 그림과 깜지 위 그림 같은. 빳빳한 종이에 쌓인 새 크레파스와 벗겨진 종이 탓에 집을 때마다 손에 색깔이 묻고 칠할 때마다 색이 섞여 버리는 낡은 크레파스 같은.
"어린이 영화에는 좋은 사람이 많이 나오고 악당은 한 명인데, 어른 영화는 다 나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은 한 명만 나와."
아이가 어릴 때 한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어린이 영화에 악당을 한 명만 넣는 것은 어른들의 마지막 로망, 혹은 위선의 종결판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치밀한 현실 반영일 수도.
집에서 전업으로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다 보면 어떤 측면에서는 그런 어른의 세계에서 조금은 비껴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만 지키면 행복이 유지될 것 같고, 크레파스가 낡는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은 충만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정반대로 어른의 세계, 이 세상에 대한 고민을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더 많이 하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니까. 세상에 없던 사람이 태어났다. 아직은 내가 아이의 세계다. 아이에게 이 많은 세상의 층위 중에 어디를 소개해 줘야 할까.
아, 진짜 이런 세상밖에 없나. 그럼 나는?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아이에게 나처럼 살라고 할 수 있나.
아이가 어릴 때 나이키 신발이 가볍고 좋아 보였다. 나이키는 1990년대 후반에 미성년자에게 가혹한 노동을 시켜 지탄받았다. 그런 브랜드의 신발을 내 아이의 조그만 발에 신겨도 되나? 그게 마음 불편한 일이라면, 다른 브랜드는 괜찮나? 아니면 무겁고 투박하고 뻣뻣한 비브랜드 신발을 신기는 게 맞나?
생태유치원에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초등학교는 공립학교를 보낼 예정이었다. 아이 입장에서 그 전환이 자연스러울까? 내 고민에 이웃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 그냥 자유롭게 놀고, 학교 가서는 공부 열심히 하면 되지 않냐고. 아이 생각도 그럴까? 이 문제로 나는 몇 달을 고민해야 했다. 그게 아이에게도 전해졌는지, 유치원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다섯 살 되던 해에 "축하해. 너도 이제 유치원에 갈 수 있어!"라고 하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제 그게 그 유치원이 싫은 것인지, 그냥 엄마 떨어져 있는 게 싫은 건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아들밖에 모르는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한참 늘어놓던 어느 이웃 엄마는, 대화의 끝에 가서는 하긴 나도 내 아들이 며느리가 해도 되는 설거지 하고 있으면 싫을 것 같아라며 웃었다. 그 집은 아들만 둘이었다. 나는 이 집 아들과 내 딸이 같이 놀게 둬도 되나?
마이쮸며 춥파춥스 맘대로 먹이는 어느 이웃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온다고 어린이용 유기농 주스를 사기 위해 옆동네까지 갔다 왔다. 이때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얼마나 예민하고 까다로우며 번거로운 이웃인 건가. 이게 맞나? 내가 무슨 짓을 하며 사는 거지?
육아를 소재로 글을 쓸라치면, 나는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 어떤 기준으로 육아의 방향을 판단하는가. 이 세상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온갖 철학적 고민이 달라붙는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를 통째로 파악해야 할 것만 같은 막연함과 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치열함 사이에서 나오는 한숨과 염려 섞인, 그러나 기쁨이고 행복이어야만 하는 이야기.
그렇지만 자꾸자꾸 풀어내 보고 싶은 이야기, 마음속 문장이 자꾸 부연 문장을 끌고 오는 이야기이다. 육아 에세이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