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짓던 내가 마침내 글을 짓는 사람이 되었을 때의 벅찬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정확한지 여전히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최고의 이벤트가 끝나고 난 후의 나는 나를 더 미워하고 한심해하기 바빴던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내가, 발목을 잡는 지긋지긋한 삶이 싫었다.
다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덜 미워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옹호》, 함지연 작가 글, 125쪽
나는 누군가의 에세이를 두고 "이렇게 쓰시면 안 돼요"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에세이도 그냥 읽기는 힘들다. 쓰는 마음에 마음이 쓰인다(그래서 에세이는 자주 읽고 싶지 않은 건지도). '작가의 글'에서 눈길이 오래 머문다. 아마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매달렸던 내 지난날 때문이겠지. 괴롭고 즐겁고 슬프고 막연한 감정 속에서도 늘 쓰기의 지속성을 고민했던 시절.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를 두고 덧없이 생각을 이어갔던 시절.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제는 지난날의 한 페이지로 남겨놓은 이유는 살아가면서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점점 늘어난 탓이었다.
안 쓸 이유가 차고 넘쳤다.
1. 질투 날 만큼 잘 쓰는 사람이 많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완성형으로 잘 써놓았다.
2. 쓰기가 동반하는 외로움과 괴로움, 감당하기 싫다.
3. 애써 쓴 글 보기 싫어지는 순간을 왜 견뎌야 하나.
4. 쓰라는 사람 없고,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5. 쓰려면 읽어야 하는데 읽기가 귀찮다. 바카라 읽기도 내 마음 읽기도.
6. 대충 살고 싶은 욕구. 진지해지기 싫은 마음.
7. 쓰고 나서 보니 이게 진짜 마음인가 의심스러움.
8. 내가 지금 글 쓰는 여유를 누릴 처지인가?
9. 쓰면? 그 다음엔?
10. 기껏 써도 완성품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
.
.
이것은 어쩌면 자기혐오와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과도 이어질 것이다. 소통에서 오는 허무를 미리 차단하려는 보호막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쓰는 일이 진절머리나게 싫어졌다면, 이제는 안 쓰기로 결심할 수 있다면, 그만큼 써봤다는 걸 의미한다. 글로 자기 마음 정리하는 데 엔간히 이력이 붙었다는 것. 그 이력에는 그동안 쓴 글들이 한몫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생각을 고르고 다듬어 몇 개의 단어들로 줄을 세울 여유는 없어서, 밥을 하고, 일을 하고, 애를 돌보고, 다음 날 아침 메뉴를 생각하다 맥없이 잠들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글 쓰던 사람이 그렇게 글을 놓고 사는 일도 있고, 놓았던 글을 다시 손에 쥐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런 글은 또 다르다. 똑같이 쓰인 문장이라도 다른 것이다. 같은 옷도 누가 입느냐에 따라 다른 것처럼. 힘겹게 마련한 틈에서 쓰인 글은 그 자체로 주인에게 귀한 시간이 된다. 그런 글을 볼 때면 갑자기 내가 미워했던 내 글들이 떠올랐다. 또박또박 적지 않고 뭉뚱그려 흘려버렸던 생각들에 대한 부질없는 부채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다시 내 글을 써야지, 내 이야기를 써야지, 소설을 써야지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편집자로 살며 작가의 꿈을 버리니 글을 쓸 때마다 느끼던 자기혐오와 자괴감은 크게 줄었다. 끝내 풀리지 않을 마음을 억지로 문장으로 만들려는 괴로움에서도 벗어났다. 그러나 이전의 나와 같은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면 아직도 생각의 오지랖이 발동하곤 한다. 이제는 그 고민 이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다시 쓰게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비로소 나는 나를 덜 미워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은, 쓰기로 결심한 사람의 것일 수도 쓰지 않겠다고 선택한 사람의 것일 수도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