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하루의 시작

by수련

아침이면 사과 한 알을 집어 든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밥숟가락으로 긁어주던 사과가 이제는 내 하루를 여는 습관이 되었다. 붉은빛과 노란빛이 섞인 사과.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껍질이 아침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난다. 칼을 대지 않고 그대로 한입 베어 문다. '아삭' 고요한 아침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과즙이 입안에 번진다. 새콤한 맛 뒤로 단맛이 따라온다. 잠이 덜 깬 몸이 조금씩 깨어난다.


나에게 사과는 하루를 시작하는 오래된 습관이자,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기억이다.

몸살감기로 앓아누운 날이면 어머니는 사과를 반으로 갈라 씨 부분을 도려내고, 밥숟가락으로 살살 긁어 내 입에 넣어주셨다. 숟가락이 과육을 긁을 때마다 "사각사각"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 뜨겁게 달아올랐던 신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 이마에 닿던 손바닥의 온기, 천천히 사과를 긁어내던 손끝의 정성이 그 맛 안에 함께 담겨 있었다.


그때 알았던 것 같다. 껍질에 흠집이 있어도, 속살에 멍이 조금 들어 있어도, 어머니는 그 부분만 살짝 피해 긁어내셨을 뿐 사과를 통째로 버리는 법이 없었다. 흠집 하나가 사과 전체의 단맛을 지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 밥숟가락에서 배웠다.


그때부터 아침에 사과를 먹지 않으면 하루의 중요한 일 하나를 빠뜨린 듯했다. 어린 시절의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홍로


사과는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여름 끝자락의 아오리는 풋풋한 신맛으로 입안을 깨운다. 추석 무렵 만나는 홍로는 붉고 탐스럽다. 늦가을의 부사는 단단한 과육 속에 깊은 단맛을 품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빛깔과 맛은 달라지지만, 아침이면 한 알을 집어 드는 내 습관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창밖 풍경을 보고 있으면 평소에는 지나치던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베란다 난간에 내려앉은 까치 소리, 위층에서 들려오는 서툰 피아노 연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가벼운 마찰음.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소음으로 여겼을 소리가 오늘은 반가운 아침의 인사처럼 들린다. 사과 한입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결을 온화하게 만든다.


지난해 사과값이 금값일 때 보조개 사과를 구입했었다. 껍질을 살피다 보면 가끔 작은 흠집이 눈에 띌 때가 있다. 매끈한 표면 어딘가에 벌레가 지나간 자국, 가지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다. 그런 사과일수록 단맛이 깊다. 상처 난 자리에 나무가 당분을 더 밀어 넣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해준 적이 있다.


'사과'라는 말에는 과일 이상의 뜻도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라고 말하는 일이다. 흠집 난 사과를 손끝으로 쓸어보다가, 가끔 자신에게 묻는다. 아직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너무 늦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사람이 있는지. 사과 하나를 통째로 버리지 않았던 어머니의 손끝처럼, 누군가의 흠집 앞에서 그만큼 나는 너그러웠던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내 삶도 사과와 닮았다. 푸르고 시큼했던 어린 날이 있었고, 햇빛을 받으며 조금씩 익어가던 시간이 있었다. 때로는 상처가 생겼고, 오래된 흠집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흠집 하나가 사과의 맛을 모두 없애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단맛은 깊어지고 향은 짙어진다. 사람도 그런 것이 아닐까. 완벽하게 매끈한 삶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고, 감추고 싶은 흔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흠집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 상처를 품고 어떻게 성장해 가는가이다.


오늘도 사과 한 개를 집어 든다. 껍질 한쪽에 작은 멍이 들어 있다. 예전 같으면 칼로 도려냈을 그 자리를, 오늘은 그냥 한입 베어 문다. 흠집도 함께 씹힌다. 쓰거나 이상한 맛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언저리가 가장 달다. 누군가 나의 어떤 흠집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베어 물어준 적이 있던가. 나는 또 누군가의 흠집을 이렇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던가. 아침에 먹는 사과를 금이라 부른다. 오늘 내가 베어 문 것은 흠집까지 끌어안은, 그래서 더 온전한 금 사과 한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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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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