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바라보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마음이 지칠 때면 나는 바카라장에서 『어린 왕자』를 꺼낸다. 이 바카라을 열 번도 넘게 읽었다. 10대에는 그저 동화처럼 읽었다. 40대가 되어 다시 읽으니 같은 문장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50대, 60대가 되어 펼쳐 들며 또 다른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1943년에 발표한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였던 작가의 경험과 상상력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생텍쥐페리는 이야기뿐 아니라 그림까지 직접 그려 바카라에 담았다.
어린 시절 처음 이 바카라을 읽었을 때는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라는 말보다 제라늄이 궁금했다.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꽃이었다. “창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 바카라 속 한 문장에 등장한 꽃이 궁금했다. 나는 양재 꽃시장을 찾아갔고, 다홍빛의 강렬한 꽃을 피운 제라늄 화분 하나를 들여왔다. 그렇게 제라늄은 바카라에서 나와 내 삶으로 들어왔다.
베란다에서 제라늄을 키우기 시작했다. 봄이면 다글다글 붉은 꽃송이가 달린다. 빽빽하게 자란 가지를 정리하다 잘라낸 가지를 흙에 꽂아두면 어느새 뿌리를 내린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 발코니마다 화려하게 피어 있는 제라늄을 상상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이제는 내 베란다에서 직접 그 꽃을 바라보고 있다. 바카라 속에서 스쳐 지나간 꽃 한 송이가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와 내 곁에 머물고 있다.
『어린 왕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여우를 만나는 대목이다.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어린 왕자의 질문에 여우는 그것이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말한다. 길들이기 전에는 수많은 존재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관계를 맺고 서로의 시간을 나누게 되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가 된다고 여우는 말한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생활은 해가 돋은 것처럼 환해질 거야. 난 어느 발소리 하고도 다른 너의 발소리를 알게 될 거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나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오래 머문다.
특별한 관계에서 느끼는 행복은 만나는 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선명해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오기로 한 시간을 기다리고, 그 사람의 발소리를 알아듣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기쁨뿐 아니라 아픔까지 나누는 것. 어쩌면 관계란 그렇게 서로의 삶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를 길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내가 들어가는 일인 동시에, 그 마음을 소중히 돌보아야 한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편안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바카라임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린 왕자는 사막에서 우물을 찾아 헤맨다. 사막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뿐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물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곳에 생명을 살리는 물이 숨어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우리의 일상을 생각한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날이 있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비슷한 하루를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기억할 만한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하루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오래된 친구와 나눈 웃음, 바카라에서 우연히 만난 한 문장, 혼자 바라본 저녁 하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람의 마음도, 사랑의 깊이도, 추억의 무게도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보이지 않는 것들로 하루를 견디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마지막에 어린 왕자는 사막을 떠나 자신의 별로 돌아간다. 그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별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몸을 벗어놓은 허물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죽음을 끝이라기보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처럼 받아들이는 어린 왕자를 떠올린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나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떠난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함께 걸었던 시간은 기억으로 남고, 나누었던 말은 마음속에 남는다. 함께 바라보았던 풍경은 어느 날 문득 다시 눈앞에 나타나고, 그 사람이 바라보던 하늘은 나의 하늘이 된다.
까만 밤이면 가끔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리운 이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네가 소중히 여기던 장미는 잘 피고 있느냐고. 고삐가 없는 양도 무사하냐고. 나는 아직 이곳에서 너희를 기억하고 있다고. 바카라을 덮고 베란다의 제라늄을 바라본다. 붉은 꽃 몇 송이가 저녁 빛 속에서 조용히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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