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없는 자리에서도 설명 없이 읽히는 한 장을 남깁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일요일 오후 잘 보내고 계신가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옷 잘 챙겨 입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보고'에 대해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업무 보고 잘하는 법에 대해 글을 한 편 썼는데, 쓰고 나서도 계속 마음에 남는 게 있었습니다. 그 글은 보고하는 자리에서 첫 줄에 무엇을 말할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제가 보고로 가장 많이 헤맸던 건 그 자리 바깥이었습니다. 보고가 끝난 뒤 제 자료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자료를 들고 가기 전까지 제가 혼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온라인 게임인 보고 잘하는 법을 찾다가 이 글에 들어오셨다면,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보고 자료는 제가 없는 자리에서도 설명 없이 읽히게, 한 장으로 다시 만드는 것
2. 상대가 이미 아는 것부터 결론까지 네 줄로 먼저 적고, 그 뼈대를 혼자 붙잡지 않고 빨리 보여 주는 것
저는 일을 하면서 보고로 가장 많은 지적을 받았습니다. 보고서를 열 번 가까이 돌려받은 적도 있고, 20분을 설명한 끝에 그래서 무엇을 정하면 되느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잘하고 싶어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도 보고에 관한 부분을 제일 먼저 펼쳤는데요. 바카라에는 결론부터 말하라는 말이 빠지지 않고 나왔습니다. 저도 그 말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서를 펴 놓으면 어디까지가 결론이고 어디부터가 근거인지 헷갈렸고, 결론을 맨 위에 써 놓고도 그 아래에 조사한 것을 전부 다시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예전의 저는 보고를 그 자리에서 끝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들어가서 설명하고, 질문에 답하고, 나오면 끝인 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자료도 그 자리에서 제가 설명할 것을 전제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말을 붙여야 읽히는 자료였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만드는 동안에는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완성해서 한 번에 통과시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보고가 왜 자꾸 되돌아오는지 알고 싶어서 되돌아온 보고서들을 다시 꺼내 읽어 봤습니다. 그리고 결국 도달한 결론은 보고는 제가 그 자리를 나온 뒤에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자료는 제가 없는 자리에서 다시 읽히고, 제가 설명하지 못하는 곳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이걸 알고 나서 보고서 쓰는 순서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고민하며 알게 된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보고는 제가 없는 자리까지 갑니다
첫 번째로 알게 된 건 제 보고 자료가 제가 없는 자리에서 한 번 더 읽힌다는 점입니다. 예전에 제안서 하나를 윗분께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좀 더 보고 이야기하자는 답을 들었고, 저는 언제까지 보시면 되겠느냐고만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안서가 며칠 뒤 더 윗분 앞에 놓인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 자리에 저는 없었습니다. 제 말을 대신해 줄 것은 그 종이 몇 장뿐이었는데, 제가 쓴 건 제 윗분이 제 설명을 들으며 읽으실 문서였고, 더 윗분이 혼자 넘겨 보실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밖에 나가 제안을 드릴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설명이 끝나면 상의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요. 저는 한동안 그 말을 거절이나 미루는 말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준비해 간 마감 날짜만 한 번 더 말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료 하나를 두고 가 달라는 말을 듣고, 차에서 그 자료를 다시 열어 봤습니다. 첫 장부터 제 앞에 앉아 계셨던 분께 하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일을 맡아 쓰실 분들이 읽을 자료가 아니었습니다. 상의해 보겠다는 말은 제가 없는 회의에 저 대신 나갈 것을 달라는 말이었는데, 저는 그걸 마감 재촉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제가 없는 회의가 있었고, 거기에 저는 마감 날짜 하나만 놓고 온 것이었죠.
그 뒤로 보고나 제안이 끝날 때 한 가지를 꼭 여쭙습니다. 이 자료를 누구에게 보여 주시면 되는지입니다. 그러면 이름이 나옵니다. 더 윗분일 때도 있고, 실제로 그 일을 맡아 하실 분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혼자 읽을 한 장을 다시 만듭니다. 제가 설명하면서 넘기던 자료 말고, 설명 없이 읽히는 한 장입니다. 첫 줄에 이 자료를 보고 무엇을 정하시면 되는지, 그 아래에 이유 두세 개, 맨 아래에 제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를 적습니다. 마감 날짜는 그다음에 말하거나, 말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장을 더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답은 꽤 달라졌습니다. 자료를 두고 간 뒤에 제가 만난 적 없는 분이 먼저 연락을 주시는 일도 생겼습니다.
2. 상대가 이미 아는 것부터 결론까지 네 줄로 적습니다
두 번째는 결론을 맨 위에 쓰는 게 불안했던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저도 결론부터 쓰라는 말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위에 쓰면 근거가 약해 보이지 않을까, 조사한 것을 다 보여 줘야 열심히 한 걸로 보일 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예전 제 보고서 첫 장은 대부분 배경이라는 제목 아래 조사한 내용을 길게 적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조사한 순서대로 썼고, 읽는 분은 궁금한 순서대로 읽으셨던 것이죠. 그러니 마지막 장까지 가야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는 문서였습니다.
짧은 보고도 똑같았습니다. 진행 상황을 묻는 메시지에 누구에게 연락했고, 뭐라고 답이 왔고, 뭐가 남았는지 다섯 줄을 꼼꼼히 써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돌아온 답은 그래서 되는 것이냐는 한 줄이었습니다. 보낸 것을 다시 읽어 보니 상대가 궁금한 건 되는지 안 되는지 하나였는데, 그 답이 다섯째 줄에 있더라구요. 열심히 적은 다섯 줄 중 네 줄은 제가 얼마나 애썼는지 설명하는 줄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고서든 메시지든 쓰기 전에 네 줄을 먼저 적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바카라에서 배운 순서인데요. 1) 상대가 이미 알고 있는 상황 2) 그런데 생긴 변화나 문제 3) 그래서 상대 머릿속에 떠오를 질문 4) 그 질문에 대한 제 답입니다. 예를 들어 주간 회의 시간을 바꾸자는 보고라면 이렇게 됩니다. 주간 회의는 월요일 아침에 하고 있다, 그런데 월요일 오전에 급한 문의가 몰려 늦게 들어오는 분이 늘었다, 그러면 회의는 언제 하는 게 좋을까, 화요일 오전으로 옮기는 것을 제안한다. 네 문장인데 읽는 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오시더라구요. 첫 문장이 상대도 이미 아는 이야기라서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낯선 이야기로 시작하면 상대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부터 생각하게 되는데, 이미 아는 것에서 시작하면 바로 결론까지 따라오셨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결론 한 줄을 맨 위에 쓰되, 그 앞에 상대가 이미 아는 한 줄을 먼저 둡니다. 그리고 조사한 과정은 지우지 않고 맨 뒤에 참고로 옮깁니다. 과정을 꼭 보고 싶어 하시는 분도 있으니까요. 내용은 똑같고 순서만 바꾼 것인데, 읽는 분의 반응이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결론을 먼저 들은 분은 나머지를 그 이유를 확인하면서 읽으시고, 그러면 질문도 훨씬 구체적으로 돌아왔습니다.
3. 초안은 혼자 붙잡지 않고, 장마다 왜 넣었는지 적습니다
세 번째는 자료를 들고 가기 전까지 제가 혼자 하고 있던 일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보고서를 혼자 잘 만들어서 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완벽하게 끝내고 싶은 욕심에 며칠을 혼자 붙잡고 있다가 들고 갔고, 그러면 방향이 틀렸다는 말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방향이 틀린 문서는 며칠을 더 고쳐도 방향이 틀린 문서였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무렵 주말 모임에서 만난 한 온라인 게임인분이 머릿속 생각을 문서로 담아내는 게 어렵다고 하셨을 때, 제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조언을 드렸다는 점입니다. 완벽주의가 있으면 시작이 어려우니 일단 쓰레기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초안을 빨리 쓰고 거기서부터 고치면 된다고요. 어디서 들은 좋은 이야기라며 덧붙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나와 돌아보니, 그 완벽주의 뒤에 숨어 초안을 붙잡고 있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제 글에 직접 적어 둔 답을 입으로는 남 이야기하듯 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지금은 보고서 파일을 열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 줄, 그 말을 믿게 할 이유 두세 개, 이유마다 붙일 자료, 이 세 줄짜리 뼈대를 먼저 보여 드리고 방향부터 확인받습니다. 다 쓴 문서를 보여 드리는 게 아니라서 처음에는 좀 민망했는데, 방향이 틀렸으면 세 줄만 고치면 되니까 다시 써 오는 일이 훨씬 줄었습니다. 그리고 들고 가기 전에는 장마다 한 줄을 적어 봅니다. 이 장은 무엇을 알려 주려고 넣었다는 한 줄입니다. 전 온라인 게임에서 안내 자료를 만들 때 지난 자료에 있던 화면 세 장을 그대로 가져왔다가, 리허설에서 그 세 장은 왜 넣었느냐는 질문에 답을 못 한 적이 있었습니다. 넣은 이유를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 세 장은 누가 물어볼 때 보여 주면 되는 내용이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뺐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한 줄이 안 나오는 장은 빼거나, 질문이 나오면 보여 줄 뒷장으로 옮깁니다. 지난 자료에서 가져온 장은 따로 표시해 두고 지금 읽는 분께도 필요한지 다시 봅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자료가 꽤 얇아지는데, 이유가 분명한 몇 장이 훨씬 잘 전달되더라구요. 보고서가 길어질 때는 제가 아직 덜 알고 있다는 신호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잘 모를 때는 뭘 빼야 할지 몰라서 다 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달라진 건 보고가 끝난 뒤의 시간입니다. 예전에는 보고를 마치고 나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기다리다가 되돌아오거나, 아무 연락이 없거나였습니다. 지금은 제 자료가 누구에게 가는지 알고 나오고, 그분이 혼자 읽을 한 장을 남기고 나오니 그다음에 어떤 질문이 올지도 어느 정도 보입니다. 보고서를 열 번 돌려받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두세 번 안에 끝나는데, 바뀐 것은 제 글솜씨라기보다 세 줄을 먼저 보여 드리는 순서와 제가 없는 자리를 생각하는 습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고를 받는 분과의 사이도 좀 달라졌습니다. 그분이 더 윗분께 가져가실 한 장을 제가 미리 만들어 드리니, 그분이 제 보고를 다시 설명하실 일이 줄었고, 그게 제 일을 밀어주시는 쪽으로 돌아오더라구요.
제가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면, 보고는 제가 그 자리를 나온 뒤에도 제 자료가 저 대신 일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1) 보고가 끝나면 이 자료를 누구에게 보여 주시면 되는지 여쭙고, 그분이 혼자 읽을 한 장 남기기 2) 상대가 이미 아는 것에서 시작해 결론까지 네 줄 먼저 적기 3) 세 줄 뼈대를 먼저 보여 드려 방향을 확인받고, 장마다 왜 넣었는지 한 줄 적기, 이 세 가지를 지켜 보려고 합니다. 다들 보고가 끝난 뒤에 자료는 어떻게 하시나요? 댓글로 알려 주시면 저도 배우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일요일도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
"진짜 일을 잘한다는 것 2"는 월·수·금 아침 8시에 이어집니다. 구독해 두시면 새 글을 바로 받아 보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