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될 때 나를 남처럼 불러 보는 법

배트맨 망토를 두른 아이들이 더 오래 버틴 이유

by김도경 dkkim

안녕하세요, 김도경입니다.


농구 경기 영상 하나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경기 내내 코비 브라이언트와 몸싸움을 하던 상대 선수가 화가 났는지, 코비 얼굴 앞에서 공을 던지는 척을 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질끈 감고 움찔했을 텐데, 코비는 눈도 깜빡이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어요.


얼마 전에 본 심리학 영상이 이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코트에 서 있던 건 코비가 스스로 만든 또 다른 자아, '블랙 맘바'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7분 남짓한 영상인데 보고 나서 며칠째 머리에 남아 있어서 정리해 둡니다.


망토를 두른 아이들


미국에서 여섯 살 아이들에게 10분 동안 지루한 과제를 시킨 실험이 있습니다. 옆에는 게임이 잔뜩 깔린 태블릿을 두고, 쉬고 싶으면 언제든 게임을 해도 된다고 말해 줍니다. 여섯 살에게 숙제와 게임기라니, 결과는 뻔해 보입니다.


연구진은 아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게임기로 가기 전에 스스로 한 번 묻게 했습니다.


1) "나는 지금 열심히 하고 있을까?"
2)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이는 지금 열심히 하고 있을까?"
3) "배트맨은 지금 열심히 하고 있을까?"


세 번째 그룹에게는 진짜 배트맨 망토까지 입혀 주고, 부를 때도 "배트맨, 잘하고 있니?" 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10분 뒤 과제에 쓴 시간은 '나' 그룹이 35%, 이름을 부른 그룹이 45%, 배트맨 그룹이 55%였습니다. 같은 아이들인데 자기를 부르는 말 하나로 이만큼 차이가 났습니다.


어른도 똑같았습니다


어른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발표를 하게 하고, 한 그룹은 "나는 왜 이렇게 떨릴까?"라고 생각하게, 다른 그룹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아, 왜 이렇게 떨고 있어?"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름을 부른 쪽이 발표를 훨씬 잘했고 부끄러움과 불안도 낮았다고 합니다.


화가 난 상황에서도 비슷했습니다. 화난 일을 계속 곱씹게 한 그룹보다, 벽에 붙은 파리가 된 것처럼 그 장면을 멀리서 내려다보게 한 그룹이 화도, 공격적인 생각도 확 줄었습니다. 화는 쏟아내야 풀린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실험 결과는 반대였던 셈입니다.


영상에서 가장 와닿았던 건 투자자들 이야기였습니다. 노련한 트레이더들은 거래 일지에 "내가 이 주식을 샀다"라고 쓰지 않고 "트레이더 A가 이런 원칙에 따라 샀다"라고 쓴다고 합니다. 손해를 봤을 때도 "A의 전략이 지금 시장과 안 맞았으니 고쳐야 한다"라고 적고요. 자바카라할 힘을 고치는 데 쓰는 겁니다.


한 발 떨어지면 생기는 일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나'라는 말로 긴장이나 유혹을 마주하면 머리는 감정을 누르는 데 힘을 다 써 버립니다. 그런데 나를 한 발 떨어진 사람처럼 보면, 같은 일이 '내 위기'가 아니라 '살펴볼 상황'이 됩니다. 감정을 누르던 힘이 판단하고 움직이는 쪽으로 넘어가는 거죠.


거리를 두면 지금 당장의 기분보다 정말 중요한 것이 보입니다. "케이크 먹고 싶다"는 눈앞의 유혹이지만, "저 사람 건강을 생각하면 참는 게 낫겠지"는 한 발 떨어져야 나오는 생각입니다.


비욘세도 원래는 무척 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무대 위에서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는데, 그게 늘 부담이었다고요. 그래서 두려움 없는 또 다른 자아 '사샤 피어스'를 만들어 무대에 세웠습니다. 데이비드 보위도 무대에 오를 때는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다른 사람이 됐고요.


영상에서 알려 준 네 가지


1) 이름 불러 말 걸기. 떨리는 순간 속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말을 겁니다. "왜 이렇게 떨어? 떨리는 게 당연하지. 그럼 지금 뭘 하면 될까?"
2) 롤모델과 물건 하나. 내가 약하다고 느끼는 자리에 맞는 롤모델을 정하고, 그 모습을 불러낼 작은 물건을 하나 정해 둡니다. 물건 자체에 힘은 없지만, 계속 쓰다 보면 그 물건이 스위치가 됩니다.
3) 옷 갈아입기. 집에서 일하더라도 일할 때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갈아입는 것 자체가 '지금부터 다른 모드'라는 신호가 됩니다.
4) "그 사람이라면?" 포기하고 싶을 때 롤모델 이름을 넣어 묻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저는 이렇게 써 보려고 합니다


영업을 하다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옵니다. 미팅 직전에 갑자기 긴장되거나, 기대했던 답이 거절로 올 때요. 예전에는 그럴 때 "아, 내가 뭘 잘못했지"부터 떠올렸습니다. 그 질문은 대부분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질문을 조금 바꿔 보려고 합니다. 거절 메일을 받으면 "담당자의 제안이 상대 상황과 어디가 안 맞았을까?"처럼, 제 이야기를 남의 일지 쓰듯 적어 보려고요. 미팅 전에는 제가 아는 가장 침착한 선배를 떠올려 "그분이라면 첫마디를 어떻게 꺼냈을까?" 하고 한 번 묻고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영상 끝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간이 지나 비욘세는 더 이상 사샤 피어스가 필요 없다고 말했고, 보위도 지기 스타더스트를 내려놓았다고요. 그 모습이 이미 자기 것이 됐기 때문입니다. 배트맨의 가면도 브루스 웨인이 원래 갖고 있던 정의감을 밖으로 꺼내 주는 도구였다는 말로 영상이 끝납니다.


결국 필요한 건 이미 안에 있는 침착함을 꺼낼 작은 장치 하나였습니다. 오늘 떨리는 순간이 오면, 속으로 제 이름을 한 번 불러 보려고 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보내세요 :)


참고 영상: 심리학 고양이, "배트맨을 상상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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