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해 보고 연락드릴게요'의 진짜 뜻

결정은 제가 나간 뒤, 제가 없는 회의에서 났습니다

by김도경 dk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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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상의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영업 첫해의 어느 하루 이야기입니다.

그날 저는 이 문장을 두 번 들었습니다. 한 번은 얼굴을 보고, 한 번은 카톡으로.


오전 열 시, 경기도의 한 병원 앞이었습니다.

차 안에서 자료를 한 번 더 넘겼습니다. 첫 장에서 무슨 말을 할지, 어디서 노트북을 돌려 보여 드릴지.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원장님은 진료 사이에 가운 차림 그대로 나오셨습니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네, 이십 분이면 됩니다."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손이 조금 빨랐습니다.

설명은 잘 됐습니다.

원장님이 먼저 고민을 꺼내셨습니다.

"사람이 하다 보니 자꾸 새는 게 있어요."

속으로 됐다 싶었습니다. 딱 그 얘기를 하러 온 거였으니까요.

화면을 넘기며 설명했고, 원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질문도 하셨습니다.

"이거 실장님이 봐야 하는 거죠?"

"네, 실장님이 쓰시게 됩니다."

"실장님 의견을 들어봐야겠네요. 데스크는 그분이 제일 잘 아니까."

"그럼요."

저는 그렇게 답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실장님이 어떤 분인지, 뭘 제일 번거로워하시는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는 원장님 한 분만 있었습니다.

이십 분이 지났습니다.

원장님이 시계를 보셨습니다.

"조금 더 상의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저는 준비해 간 말을 꺼냈습니다.

"이번 주까지 결정해 주셔야 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악수를 하고 나왔습니다.


차에 앉았습니다.

시동을 걸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고개도 끄덕이셨고, 웃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답은 "상의해 보고"였습니다.

누구와 상의하시는지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물어볼 생각도 못 했습니다.

수첩을 꺼내 병원 이름 옆에 "대기"라고 적었습니다.

그 수첩에는 그런 줄이 이미 여러 개 있었습니다.

팀장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땠어?"

"분위기 좋았습니다. 상의해 보고 연락 주신답니다."

"그래, 기다려 봐."

저도 그 말을 믿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날 저녁, 사무실에서 카톡을 보냈습니다.

"원장님, 오늘 말씀드린 조건이 이번 주까지라 연락드렸습니다."

답이 왔습니다.

"조금 더 상의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낮에 들은 것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보냈습니다. 다른 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연락은 없었습니다.

며칠은 아침마다 카톡을 열어 봤습니다. 읽음 표시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안 열게 됐습니다.


몇 달 뒤, 다른 병원에서 비슷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설명이 끝날 때쯤 원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실장님이랑 선생님들 먼저 들어보라고 할게요."

"제가 다시 와서 설명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먼저 얘기해 볼게요. 자료 하나 두고 가세요."

저는 원장님께 드리던 자료를 그대로 두고 나왔습니다.

차에서 그 자료를 다시 열어 봤습니다.

첫 장부터 원장님께 하는 말이었습니다. 실장님이 읽을 자료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몇 달 전 그 병원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이 회의가 있었던 겁니다.

제가 없는 회의였습니다.

원장님이 실장님과 선생님들 앞에서 저 대신 설명하시는 자리.

저는 거기에 아무것도 놓고 오지 않았습니다. 마감 날짜 하나만 놓고 왔습니다.

두 번째 병원은 달랐습니다.

자료를 두고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실장인데요, 원장님이 주신 자료 봤어요. 오늘 오후에 잠깐 오실 수 있어요?"

그날 오후에 갔습니다.

실장님은 제 자료를 이미 세 번쯤 읽으신 상태였습니다.

질문이 원장님 질문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거 예약 취소되면 문자 자동으로 나가요?"

"취소 사유는 저희가 따로 적어야 해요?"

전부 매일 데스크에서 겪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대답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약은 그다음 주에 됐습니다.

실장님이 먼저 읽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원장님은 그날 저에게 "예"를 하실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매일 그걸 쓸 사람이 같이 정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원장님은 그분들께 가서 다시 설명하셔야 했고, 손에 든 건 원장님용 자료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의해 보고"는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없는 회의에 저 대신 나갈 것을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걸 마감 재촉으로 받았습니다.


회사에서도 같은 일을 겪습니다.

팀장님께 제안서를 올립니다.

"좀 더 보고 얘기하자."

저는 "목요일까지 보시면 될까요?"라고 여쭤봤습니다.

"본부장님 보고가 수요일이라."

그 제안서가 수요일에 본부장님 앞에 놓인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 자리에 저는 없습니다.

제 말을 대신 해 줄 것은 그 종이 몇 장뿐입니다.

제가 쓴 건 팀장님이 읽으실 문서였지, 본부장님이 혼자 넘겨 보실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장을 다시 썼습니다. 설명 없이 읽히는 한 장으로.

"좀 더 보고 얘기하자"를 들으면 저는 아직도 언제까지 봐 주실 수 있냐고 먼저 묻습니다.

그걸 들고 어디로 가시는지는 그다음에야 묻습니다.


요즘은 미팅이 끝날 때 한 가지를 여쭤봅니다.

"이거 누구한테 보여 주시면 될까요?"

그러면 이름이 나옵니다.

실장님일 때도 있고, 같이 진료하시는 원장님일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보게 될 것을 남기고 나옵니다.

제가 설명한 자료 말고, 그분이 혼자 읽을 한 장을요.

마감 날짜는 그다음에 말합니다. 말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순서가 바뀝니다.

마감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오고, 차에 앉아서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카톡으로 한 장을 더 보냅니다.


ps. 그 병원은 아직도 지나갈 때마다 쳐다봅니다. (연락은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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