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살인의 추억
(집으로)
30년 만에 부모님은 화성에 신축 아파트를 구매할 수 있었고, 우리는 처음으로 새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다. 아빠가 근무하시게 된 부대가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아파트 주변은 온통 논이었고, 바로 정면에는 커다란 레미콘 공장이 있었다. 아파트를 두른 도로에는 날마다 시멘트를 실은 레미콘과 대형트럭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알고 보니, 우리의 보금자리는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러나 나는 살인의 추억이고 뭐고 별로 개의치 않고 논이며 산이며 골목이며 잘 쏘다녔다. 운동삼아 강가를 걷기도 하고, 바카라을 빌리러 도서관에도 갔다. 그러다 병점에 있는 어학원에 면접을 보았다. 카리스마 있는 원장님과 프로페셔널한 한국인 교사들, 그리고 유쾌한 원어민 교사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가르쳤는데, 매월 영어연극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리곤 했다. 아이들은 흥미로운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서 즐겁게 영어를 공부했다.
오후 2시까지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근무였는데, 자료와 시험을 준비하거나 학부모와 면담하고 집에 들어오면 11시가 훌쩍 넘었다. 원어민 교사들과도 긴밀히 소통해야 했는데, 혹시 아이들과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몰라서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바쁘고 재밌게 학원생활을 하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머리가 핑 돌았다. 날마다 피곤함과 긴장감 속에서 지내다 보니 몸에 이상반응이 생겼다. 몹시 아쉬웠지만, 원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학원생활을 정리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당시 한국 여자 교사들은 너도나도 눈가에 다크서클이 늘어져 있었고 예민해져 있었다. 원장님의 타이트한 수업 및 관리 방침과 과중한 업무들이 한국 교사들에겐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학원에서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밝고 씩씩했던 교수부장님도 나날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 보였고 결국 내가 그만두기 전에 먼저 그만두셔서 다른 여자분이 그 자리에 왔던 기억이 난다. 마치 위플래쉬에 나오는 플레쳐 교수의 완벽한 집념에 마구 휘둘리듯이 모두가 날이 갈수록 버거웠다.
한국 여자 교사들과 원어민 남자 교사들은 각각 한 팀이 되어 수업을 진행했는데, 한국 여자 교사들은 문법과 독해를 가르치고, 영어동화를 바탕으로 영어영극을 준비하고, 학부모와 상담해야 했다. 시험기간이 되면 교과서의 문제들을 모두 편집해서 각 학년의 문제집을 직접 만들었고, 그 문제집으로 내신을 준비하고, 매월 개인별 학습리포트를 입력하고 코멘트를 달아야 했다. 게다가 원어민 남자 교사들과 소통해서 수업에 반영해야 했고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관리하는 것도 한국 여자 교사들의 몫이었다.
한편, 원장님은 원어민 교사들에게 집도 구해주고 여러 편의를 봐줬는데, 그들 역시 적응하는데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 여자 교사들처럼 본수업 외의 잡다한 업무들은 별로 없었다. 나중엔 원어민으로 한국 남자 교사가 오기도 하고, 원어민 여자 교사가 대신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다들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종종 아이들과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고 학부모님께 설명드리고 원어민 교사들과 소통해서 원장님께 보고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솔직히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학원일을 쉬게 됐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늦잠도 자고,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티브이도 보고, 쓸데없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모든 에너지가 바닥나고 텅 비어버린 느낌 때문에 모든 일상이 정지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하고 예민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간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한동안 가족을 제외한 외부인들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방에서 며칠 동안 잠만 자거나, 그저 하염없이 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세상을 향한 문을 나섰다. 엄마가 농사지으신 밭에 나가서 일손을 돕기도 하고, 가끔씩 가족과 등산을 하기도 하고, 주말엔 근처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청년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때 처음으로 동강에서 래프팅도 해보고, 설원에서 보드도 타봤다.
무엇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사주신 피아노가 있었고, 그것을 보물처럼 여기며 외롭고 슬플 때, 혹은 지루하거나 심심할 때 건반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런 어렵고 힘든 상황과 느낌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부모님에 의해 한 달간 성빈센트 병원에 강제로 입원한 적도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한결같이 차분하고 질서 있게 생활했다. 여전히 피아노를 쳤고, 바카라을 읽었고, 서예도 했고, 음식을 만들고, 꽃바구니도 만들고, 친구도 사귀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