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파트너가 보여준 '진정성'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경적이 끊이지 않는 대형 항구에서 거대한 선박을 몰며 느끼는 극심한 스트레스보다, 마음의 평화를 택해 작은 나룻배를 모는 삶을 선택했다는 현지 선장의 이야기였다. 그는 수입이 이전의 3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고요한 강 위에서 느끼는 자유와 평온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 결단과 미소 속에는 삶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담겨 있었고, 나는 그가 선택한 그의 평화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와 내 주위를 세심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힘내자'와 '빨리빨리'라는 말로 압축되는 한국인의 분주한 삶, 그리고 평온과 내면의 안식을 뜻하는 동남아의 '샨티(Shanti)' 문화. 서로 다른 삶의 철학이 만들어 낸 이 간극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1년 전 일본의 주일미군 기지 작업 현장에서 마주했던 장면들이 기억 속에서 또렷이 떠올랐다.
나는 주한 미군 및 주한 미국 대사관과 계약을 맺고 가구와 가전제품의 창고 관리, 운반, 배달, 설치 등을 담당하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내 나이 어느덧 70대 중반. 비록 첨단 기술을 다루는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트럭을 몰고 정직한 노동력을 쏟아붓는 이 현장에서만큼은 우리 세대의 경쟁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일본의 업무 문화는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일본인들은 지독하리만치 합리적이고 도덕성이 높았으나, 이른바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매뉴얼 슬롯'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능력이 뛰어난 직원이 자발적으로 1.5인분의 역할을 해내고, 고용주가 그에 걸맞은 보상을 기꺼이 지급한다면 업무는 훨씬 빠르게 진척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 감독자는 각종 규정과 절차를 이유로 나의 이러한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이는 일정이 늦어지더라도 원칙과 제도를 고수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젝트의 성공보다 규정과 절차를 우선시하는 경직된 조직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기업은 설령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완수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하며, 이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사라지는 순간 기업의 가치도 함께 소멸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작은 난관이나 변수가 생기면 이를 핑계 삼아 프로젝트를 포기할 궁리부터 하는 '나약한 완벽주의자' 같았다. 그들은 의욕이 없기보다는, 매뉴얼이라는 무거운 돌덩이에 사기가 눌려 전진하는 동력을 잃어버린 태엽 인형 같았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그것은 '메이와쿠(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명목하에 바카라임을 회피하려는 극단적인 위험 기피 성향과 오랜 불황이 낳은 무기력증의 발로였다. 조금이라도 이례적이거나 문제 발생 소지가 있으면 이를 핑계로 입찰 자체를 포기해 버리려는 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팽팽하다 못해 질식할 것 같은 조직의 경직성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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